무식했던 옛 시절을 떠올리며
딱히 소비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중에서 약간 무분별하게 구입하게 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책이다. 물론 대출도 자주 한다. (코로나 가운데서도 내가 누리는 유일한 특권이 있다면 바로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동네 주민센터를 통해 상호대차 서비스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가장 간편하게 빌릴 수 있는 방법은 학교 도서관이 아닐까 싶다. 거기다 운이 좋게도 우리 학교는 규모에 비해 도서관에 책이 상당히 많은 곳이라 더욱 기분 좋게 들르게 된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볼 때 가장 큰 장점은 신간 도서들이나 관심 있는 책들을 부담 없이 볼 수 있다는 것과 즉시 대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책을 주로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나로서는 배송의 기다림이 때론 아쉬울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유일하게 안 좋은 점을 꼽으라면, 읽다가 마음에 드는 부분을 발견하였을 때, 내 책이 아님으로 인해 밑줄을 그을 수도, 접을 수도 없다는 것인데, 그런 책을 발견할 때면 아, 이 책은 사야 했는데... 하는 그런 마음이 들고, 책상에 쌓인 수많은 책들을 보면서 결국 살까 말까를 고민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대출보다는 구입하는 것을 선호하게 됐다. 결국 쇼핑 본능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사 둔 책을 읽는 것이라는 김영하 작가의 말을 빌미로 삼아 오늘도 서점 어플을 기웃하는 내가 있다.
요즘은 개인 책방들이 많다. 사실 그런 책방은 돈을 벌기 위해 운영되는 곳들이라기보다는 책방 주인의 지극히 사적인 공간을 위한 곳으로 마련된 곳이라 여겨질 법 한데, 나도 그런 그런 책방을 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김연수 작가님의 줌 강연에서 들었던 말 때문일까. 그런 책방에 대한 욕구가 한결 강렬해졌다. 책(일곱 해의 마지막)에 대한 긴 말씀 끝에 작가님이 덧붙인 이야기 때문이다. 여행지(해외 국내 막론)를 가면 꼭 그곳의 작은 서점, 혹은 그 도시의 가장 큰 대형서점에 들른다고 한다. 일부러 찾아가서 그곳에서 꼭 책 한 권을 사고 그날의 이야기를 그 책의 앞표지에다가 기록해 두는 것이 본인의 큰 즐거움이라고 하셨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해보시라 추천했다.
참으로 노팅힐이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는 말해 무엇하리. 그리고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의 나의 무지함이 떠올랐다.
대학생 때, 친한 친구로부터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를 다녀온 경험을 들은 후, 나는 미처 내가 친구 이전에 파리에 갔음에도 불구하고 거기를 가봐야겠다 생각하지 못한 나의 무식함에 후회를 했더랬다. 물론 한 때 영화광이었더 내가 <비포선셋>을 보지 않았을 리는 만무했지만, (오래전에 봤던 영화 속 그 장면을 떠올릴 만큼 영화가 인상적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나는 의무적으로 책을 읽고 있던 때라 유럽 여행을 가서 작은 고서점을 찾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의 나는 왜 그렇게 무지했을까 싶다. 빈에 들러서 오케스트라 공연을 하나 보지 못했다니! 물론 무지라기보다는 빡빡한 일정과 미리 준비하지 못함으로 인한 선택적 놓침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그것의 가치를 덜 중요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나중에 다시 와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겠다는 결심을 했던 어렴풋한 기억이 나는데, 해외여행을 기약할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는 것도 참 아이러니다.
무식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 부끄러운 일화가 떠오른다. 대학 때 교양수업을 함께 들었던 친구와 어쩌다가 일본 여행까지 함께 다녀온 기억이 있다. 한 번씩 그 친구를 떠올리면 나를 얼마나 무식쟁이로 기억하고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지금도 얼굴이 달아오른다.(그래서일까... 그 친구와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아직도 선명한 기억 속 한 장면이 있다. 어느 햇살 좋던 날, 드넓은 교정에서 교양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데, 친구가 콜린 퍼스에 대한 이야기로 한창 들떠 있었다. 당시 그 배우는 BBC에서 제작한 ‘오만과 편견’ 드라마로 스타가 된 상태였지만 ‘로리’와 ‘캐리’에 빠져있던 나로서는 고매한(?) 영국 드라마 주인공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당연히 그 배우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이후 ‘브릿짓 존슨의 일기’로 그 배우에게 친숙해졌다.) 그 친구는 한창 열을 올려서 ‘콜린 퍼스’의 멋짐에 대해 열변을 토했으나 맞장구를 칠 수 없었던 나는 그야말로 아주 무식한 말 한마디를 꺼내고야 말았다.
“오만과 편견? 처음 들어보네?”
“오만과 편견을 몰라?”
친구는 정말이지 놀란 눈빛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친구의 되물음 속 <오만과 편견>은 단순히 드라마 제목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맞다. 영국 드라마 제목은 모를 수 있다. 하지만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모르면 안 됐었는데, 21살의 나는 오만과 편견은 물론이며 제인 오스틴의 제이도 몰랐던 터라, 그 친구의 더할 나위 없이 커진 눈과, 약간 주춤하는 듯한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일본 여행은 그 이후로 다녀왔겠지? 어떻게 다녀온 건지 지금도 놀랍다.)
다행히 그 이후로 동기들의 수준(?)에 맞추기 위해 책을 열심히 탐독하는 시기가 찾아왔는데,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 친구가 떠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면서도 참으로 부끄럽다. 참 무식했구나 싶다. 공부는 무슨 머리로 해서 대학은 어찌 들어갔을까? 어찌 보면 그런 문학 작품 하나 제대로 모르고 소위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모이는 대학교에 갈 수 있는 우리나라 교육도 문제구나 싶은 생각도 들고... 물론 지금이라고 대단한 지성인은 아니라 (알만한 문학 작품들을 다 읽어보지 못했기에) 누군가 보기에는 아직도 무식쟁이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책 읽기의 즐거움 혹은 문학의 가치에 대해 진심으로 느끼는 바가 있는 만큼 그런 표현은 갖다 부치지는 않을 것이다.
하긴 또 생각해보면 그거 모른다고 해서 살아가는 것에 문제 될 것은 없다. 수업시간에 무엇을 설명하려다가 이 대목이 생각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에게 기습 퀴즈를 낸 적이 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OOOO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퀴즈라기보다는 우리가 주고받는 대화의 한 장면이라고 여겨 그리 던진 것인데, 돌아오는 답변은 무음이었다. 아이들은 내 입에서 나온 문장을 정말이지 처음 듣는 듯한 눈빛이었고, 순간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건가? 싶은 생각에 우리 반에서 책을 열심히 읽는 친구들에게 레이저를 쏘아댔지만 그들 역시 갸우뚱하면서 순수한 눈빛으로 응대할 뿐이었다. OMG! 싸늘한 침묵 가운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오아시스?’라는, 본인도 미처 확신에 차지 못한 대답을 귀신같이 알아듣고 혼자 흥분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물론 우리 반 아이들은 별 감흥 없어 보였지만 말이다.
그래, 그 문장을 모른다고 해서 큰일 나지 않는다. 그 한 문장 모른다고 해서 인생에 낙오자가 되거나 큰 걸림돌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당시의 내가 제인 오스틴을 몰랐다고 해서 친구가 없었던 것도, 대학시절이 엉망이었던 것도, 학점이 펑크가 났던 것도 아닌 것처럼 말이다. 파리에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 들러보지는 못했지만 대신 많은 미술관들과 유적지를 돌아보며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문학 작품을 혹은 예술을 잘 모른다고 해도 먹고 사는 데에는 사실 아무 지장이 없다. 하지만 나는 그런 예술이 삶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 가치를 잘 몰랐었다. 지겹고 재미없고 고지식한 사람들이 자신의 교양을 뽐내는 수단이라 여겼다. 하지만 읽는 즐거움과 듣는 즐거움, 그리고 보는 즐거움을 알게 되니 세상이 조금 달라 보였다. 그것은 단순히 값비싼, 팔자 좋은 사람들만이 향유하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니 별거 없다 생각했던 내 인생도 더 이상 초라하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챗바큇처럼 굴러가는 일상도 그저 견디어내는 것임을. 인간의 삶이란 참으로 위대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참으로 비참하며 아무리 재능 있고 뛰어나게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그 역시 필부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을 때, 그래 인생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어 지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 예술을 소유할 수는 없지만 그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음에 참으로 감사하다. 누가 무엇을 읽든, 쓰든, 보든, 향유하든 그것을 간섭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에도 감사하다. 인생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네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고 충고했던 아버지의 말씀처럼, 내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만은 않은 삶 속에서, 자신만만하게 호언장담했던 일들은 안갯속에 가려진 채 그 실체가 뚜렷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으면서 나와 비슷한 처지의 인물을 발견할 때, 그 속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할 때, 그것은 엄청난 위로가 되어준다.
‘오만과 편견’을 몰랐던 무식쟁이는 이제 그 누구보다 읽기의 즐거움 속에서 쓰기의 괴로움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보겠다고 하루하루를 버티어내고 있다. 단순한 기술자가 아닌 나만의 기술을 가진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그 믿음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으로 다시 한번 웃을 수 있게 되는 지금, 나의 글이 좋다 말해주던 누군가의 응원을 떠올리며, 힘을 내 본다.
끝으로 한 번씩 생각나는 빅터 프랭클 교수님의 말을 덧붙여본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만 같은 저 멀리 유럽에서의 한 석학이 제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에 위로를 받는 나를 보면서 ‘만유인력의 법칙’이 떠오르는 것은 지나친 착각일까. 그나저나 무지와 무식의 차이에 대해 찾아보다 대충 이 글을 마무리하는 나는 아직 멀었다 싶다.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말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표적으로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더욱더 멀어질 뿐이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행복은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으며, 성공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에 무관심함으로써 저절로 찾아오도록 해야 한다. 나는 여러분이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이 원하는 대로 확실하게 행동할 것을 권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 얘기하건대 언젠가는! - 정말로 성공이 찾아온 것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성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서문 by 빅터 프랭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