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장 > 소중한 삶을 전하려 합니다.
베란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산이 뚜렷하지 않다. 안개가 낀 것 마냥 흐릿하다. 징조가 좋지 않다. 항상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어김없이 멘트가 흘러나온다. ‘오늘은 미세먼지 농도가 매우 나쁨 단계까지 오를 것으로 예상됩니다. 출근길에 마스크 챙기시는 거 잊지 마세요.’ 7:15분쯤인가 싶어 확인하니 16분이다. 첫째 아이가 다가와 물어본다.
“엄마 오늘 미세먼지 최악이야?”
“응, 오늘도 미세먼지가 많아서 놀이터에는 못 가겠는걸?”
어플을 켜서 ’매우 나쁨’이라는 문구가 뜬 화면을 아이에게 보여주었다. 아직 글씨를 읽을 수는 없지만 그 속에 그려진 화가난 표정의 뿔난 얼굴 그림을 보고 상황을 대충 짐작하는 것 같다. 이제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 돼 버린 빨간색의 뿔난 모습. 아침에 환기를 시키려 창문을 열기 전에 어플을 켜서 오늘의 미세먼지를 확인하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 오늘의 창문 열기는 아무래도 포기해야겠다.
미세먼지 덕분에 공기 청정기 전성시대가 되었다. 상황이 어떻든 피해를 입는 사람이 있나하면 그 가운데서도 돈을 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세상의 법칙이 이런 건가 싶어 무섭기도 하다. 이제 고작 5살밖에 안 된 아이 입에서도 스스럼없이 나오는 '미세먼지'라는 말이 아직도 낯설다. 그나저나 최악이라는 말은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물처럼 공기를 사 마시는 시대가 왔다고 이야기했을 때 아이들은 말도 안 된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나역시 말하면서도 반신반의 했지만 실제 기사를 읽고서 이야기 했던 것이기 때문에 거짓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인터넷 검색창에 ‘산소캔’이라고 검색하면 많은 제품이 검색된다. 심지어 2006년부터 기사화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공기에 대한 우려가 벌써 십여 년 전부터 있어왔다는 뜻이다. 편의점에서 생수를 사 먹는 일이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돼 버린 것처럼 산소캔을 사서 흡입할 시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 생수를 사 먹다니! 옛 우리 조상님들이 보면 말도 안 될 이야기가 현실이 되었듯 우리 아이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들으면 말도 안 될 이야기가 펼쳐지는 시대가 된 것이다.
2015년 대한민국을 최악의 공포로 밀어 넣었던 메르스를 기억하는가? 그 당시 나는 첫째를 임신 중에 있었고 임산부들은 특히나 조심해야 한다는 온갖 뉴스들 속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영화 속에서만 일어날 것 같았던 일들이 펼쳐지는 가운데 그 질병으로 누군가의 사망 소식을 듣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메르스는 신종 바이러스로 인한 질병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바이러스는 점점 진화하고 강력해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바이러스들은 백신이 발명되는 속도보다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병에는 병원균을 제거할 백신이 필요한데, 적절한 백신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최초의 항생제라 불리는 페니실린이 상용화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는가? 백신은 언젠가는 개발되겠지만 상용화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그 사이에 일어나는 피해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신종 바이러스들이 세상에 기사화되고 알려지게 될까? 모르긴 몰라도 일반인들이 모르는 심각한 바이러스들이 이미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야기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씩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정말 무섭다. 물론 실제로 경험하지 못해 그 공포감이 어느 정도 일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영화에서도 많이 다루어지는 주제인 만큼 간접 경험을 하게 될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어린 시절, 나는 모기차를 쫓아다니며 즐거워했다. (지금 생각하면 방충제를 그냥 들이마신 꼴인데, 아직 멀쩡히 잘 살고 있으니 안도의 웃음이 난다.) 여름이면 늦은 밤까지 가로등 아래서 친구들과 뛰어놀았다. 엄마의 밥 먹으라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친구들과 고무줄놀이, 훌라후프 돌리기, 공기놀이, 술래잡기 등의 놀이를 하면서 온 동네를 뛰어다녔다. 밤이고 낮이고 놀이터에서 흙과 함께 뒹굴었다. 그리고 명절이 되면 큰엄마와 사촌들과 터미널에서 옥수수를 먹으며 시골로 내려가는 시외버스를 기다리곤 했다. 시골 할머니 집에 내려가 경운기를 타고, 모내기를 위해 물이 가득 찬 논에 들어가서 진흙이 범벅이 된 채 수영하고 놀았다. 미꾸라지를 잡으며 신나 했고, 할머니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시골길을 걸으며 뱀을 만나기도 했다. 소여물을 주며 소가 내미는 혀에 얼른 지푸라기를 내려놓았다. 할머니를 따라 밭에 가서 고랑을 따라 뛰어다녔다. 숙모가 잡초를 뽑다 잡은 커다란 방아깨비가 위아래로 방아를 찧는 듯이 끄덕이는 것을 보며 깔깔대며 웃어댔다. 할머니가 직접 쏘아준 엿을 먹으며 세상에서 가장 달콤함을 맛보았고, 불쏘시개를 주워다가 아궁이에 밀어 넣으며 뜨거운 열기에 뒷걸음질 쳤다. 밤이면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아랫목에 누워서 이리저리 몸을 굴려댔고, 숨 막힐 듯 두꺼운 이불을 걷어찬 기억이 난다. 한 번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 할머니가 사둔 큰 생선 한 마리가 다음 날 아침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적도 있었다. 다들 어찌된 상황인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무렵, 아침 일찍 밭에 갔다 돌아오신 할머니가 ‘얌생이가 먹었구먼’이라며 혀를 끌끌 차셨던 기억도 생생하다.
‘파란 똥 줄까 빨간 똥 줄까’ 귀신 손이 튀어나올까 제대로 용변도 못 보고 후다닥 나오기 급했던 지옥의 화장실 행. 발 밑으로 똥이 가득 찬 푸세식 화장실이 무서워 매번 전전긍긍했던 그 날들이 한 번씩 떠오른다. 지금 생각하면 이렇게 나열해 놓은 것들이 내가 진짜 경험한 세상이 맞나 싶을 정도로 현실감 없는 이야기 같다. 하지만 이 기억을 공유하는 내 동생과 사촌들이 있으니 지어낸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자라서 언젠가 내가 겼었던 어린 시절 이야기들을 해 주면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싶다. 공감은 바라지도 않고 내가 한 이야기들을 이해나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주로 놀이터에 데려가고 집 근처에 있는 공원에 가는 편이지만 미세먼지가 많은 날이면 어쩔 수가 없다. 집에만 있기 답답하니 한 번씩은 어디를 데리고 다녀야 한다는 생각에 될 수 있으면 어디든 나가려고 하지만 미세먼지가 심한 날에는 결국 실내로 데려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되도록 공원아나 숲으로 많이 놀러 가려고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점점 자연과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자연이 만든 숲보다는 빌딩 숲에 익숙한 것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주말이면 코엑스나 롯데월드 같은 쇼핑 몰에 가게 되기 때문이다. 비싼 연회비를 지불하고 물고기를 비롯한 해양 생물들을 관람한다. 게다가 이제 일정 연령을 초과했기 때문에 아이 몫의 돈을 더 지불해야 한다. 그리고 어떨 때는 키즈 카페에 간다. 역시 얼마의 돈을 지불한다. 시간도 무제한이 아니라 2시간이 지나면 오버 차지가 붙는다. 비싸다고 생각되는 값이지만 주말이면 아이들과 부모들로 넘쳐난다. 처음에는 그 값이 너무 비싸서 당황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노는데 돈이 든다는 것이 와닿지 않았다. 먼저 육아를 경험한 친구들의 말을 들으며 '나는 안 데려가야지' 했지만 정작 아이를 낳고 보니 말이 안 되는 생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와중에 다행이라면 그래도 서울은 찾아보면 갈 수 있는 곳이 많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 아이들이 어린 탓으로 이동에 제한이 있지만 아이들이 좀 더 크면 갈 수 있는 곳이 좀 더 다양해질 것 같다.)
우리 아이들은 경험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경험을 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 많은 경험을 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것을 의무감에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든 다 해봐야 하고 어느 정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나도 모를 압박감. 예전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반에는 공부 잘하는 아이, 노래 잘하는 아이, 그림 잘 그리는 아이, 싸움 잘하는 아이 그래도 친구들이 각자의 특성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선생님들이 농담처럼 하는 이야기가 있다. 요새는 공부 잘하는 아이가 노래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린다. 심지어 싸움도 더 잘한다고. 왜 이렇게 돼 버린 걸까? 저마다의 특성보다는 분야에 관계없이 뭐든 잘하는 사람이 되려고 모두 애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너무 좁은 것은 아닐까, 혹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게 한 사건이 있었다. 둘째 아이를 데리고 지하철을 많이 타는데, 한 번은 엘리베이터에서 중학교 1학년 정도 돼 보이는 여학생이 가벼워 보이는 태블릿 피시를 들고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을 보았다. 실로 충격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문제를 푸는 모습에서 굳이 저런 걸 들고 공부를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과 동시에 내가 너무 구닥다리 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요즘 아이들은 저것이 일상이구나 싶었다. 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모두 경험한 세대로서 아날로그의 좋은 점을 알고 있을 뿐이지 그것이 더 우월한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최첨단 디지털 시대에 '공책에 연필로 필기하는 것이 일반적인 혹은 옳은 공부법'이라는 생각은 실로 문제가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90년생이 온다>를 읽으면서 내가 시대의 흐름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구나 싶은 생각을 많이 했다. 책에 따르면 90년 생에게 대학은 더 이상 학문의 금자탑이 아니며 그저 더 좋은 직업을 가지기 위한 하나의 관문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기업의 인재 채용 역시 장기간에 걸쳐 회사에 도움될 만한 '될 성 부른 떡 잎'을 뽑는 것이 아닌, 이제 막 입사한 신입 사원들이 가시적인 성과를 뽑아내기를 바라는 기대감으로 이미 '열매를 맺은' 나무와 같은 인재를 뽑는 것에 초첨을 맞추고 있다고 한다. 왜 지금의 아이들이 뭐든 잘해야만 하는 것인지를 조금이나마 짐작케 하는 대목이었다.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세계는 어떨지 과히 짐작조차 되지 않아 씁쓸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요즘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내가 고단하다. 어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나 싶다. 하지만 또 그것은 온전히 내 착각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내가 살아온 지난 시절이 지금보다 더 좋은 세상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90년 생의 친구들이 80년 혹은 70년 생의 삶에 관심이 없듯, 지금의 아이들은 그 세계를 모르고 알 필요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내가 나의 그 시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듯, 지금의 아이들도 현재 내가 문제라고 느끼는 것들을 문제라고 여기지 못하고 그냥 자연스러운 것으로 수용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됐든 아이들이 앞으로 만나게 될 세상은 아직 나도 가보지 않았고 그들도 가보지 않았기에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1년으로 줄어든 세상이라 앞날을 예측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에서만 보던 로봇이 우리 집에 들어설 날이 머지않은 세상이 아닌가.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고 우리는 이제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예측하기보다는 어떤 자세로 삶에 임해야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될 때가 되었다. 빠르게 진화하고 변해가는 세상이지만 인간은 여전히 삶과 죽음의 테두리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주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의 부모님이 그렇게 살아오셨고 나 역시 그런 삶을 살고 있고 우리 아이들 역시 본인에게 주어진 삶을 그저 살아가야 할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든 우리가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런 가운데 우리 아이들이 지금 당장 '어떤 대학'에 가기 위해서 그 많은 '학원'들을 다니고 있는 것이라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목표하던 대학이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어제도 흔들리는 마음에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본인 역시 앞으로의 세상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은 그런 세상에서 아이들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그 힘을 길러주는 일이라 했다. 그래 맞다.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 버텨낼 수 있는 힘!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나의 일이었다.
나 역시 많은 경험을 한 것은 아니라 생각하기에 솔직히 두렵고 걱정된다. 그리고 자꾸 흔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흔들리는 가운데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나의 신념이었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우리 아이들이 만나게 될 세상이 무엇이 됐든 아이들이 그 가운데서 자기만을 길을 찾아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다. 느리지만 조금씩 나아가는 사람이 되어 온전히 자신만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잠시 잊고 있었던 다짐을 되새기게 해 준 친구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 표지 사진 : Photo by sergio souza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