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장 > 다양한 아이들을 만납니다.
붉은 악마와 ‘대~한~민국~짜자자짝짝!’이 온 거리를 뒤덮어 버린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나와 내 친구들은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우리는 길거리 응원을 가는 대신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나 친구 집에 모여 월드컵을 시청했다. 우리는 한 껏 흥분했고, 당연히 공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학창 시절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한 적은 없다. 반에서 1등은 해봤지만 전교에서는 그저 공부 잘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나마도 초, 중학교 때의 성적이지 고등학교에 가서는 동아리 활동이었던 방송부 생활에 온 힘을 쏟느라 자연스레 공부에 소홀해졌다. 그런 내가 한창 공부를 잘한다 했을 중학교 시절에도 매일 꾸준히 공부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친구들이랑 노는 게 좋았고, 늘 주변에 친구들로 북적이는 성격 좋은 아이였다. 수업시간에 졸음이 밀려와 미친 듯이 헤드뱅잉을 하는 나를 보며 친구들은 성적이 좋은 나를 의아해했다. 공부 안 하는 척을 하려고 쇼를 한 게 아니었다. 공부잘하는 아이처럼 보이지 않아도 성적이 잘 나왔던 이유는 온몸을 불사르는 벼락치기 덕분이었다. 그래도 욕심은 있어서 성적이 잘 나오기를 바랐던지라 시험기간에만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중학교 때 까지는 그것이 통했다. 시험 기간 중 밤새 달달 외울 정도록 공부를 하면 제법 그럴듯한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3학년 때는 반에서 1등으로 졸업을 했고, 담임 선생님께서는 자연스럽게 특목고 진학을 권유하셨다. 하지만 나는 일언지하에 그것을 거절했고(당시 내신으로 인해 특목고를 꺼리던 분위기도 한몫했다) 집 근처에 있는 일반고로 진학을 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지금 생각해보면 스스로에 대한 자만이었던 것 같다. 특목고에 안 가도 좋은 대학 갈 수 있다는 그런 생각? 나의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 같은 것은 없었고, 그저 함께하는 친구들과 학교를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나의 결정에 후회까지는 아니지만 나중에 특목고에 진학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해 본 적은 있다. 물론 특목고에 간다고 좋은 대학에 가는 건 아니다. 단지 내 진로에 대해 일말의 고민 없이 쉽게 결정한 것에 대한 후회가 종종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나는 집 근처에 있는 일반고에 진학하였고 즐거운 학창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성적은 기대만큼 오르지 않았다. 중학교 때만큼의 결과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였다. 단순 벼락치기가 수능에 통할리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방송부 생활에 올인하던 시기였으니 공부와는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때는 지금 생각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공부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수능은 먼 나라 이야기로만 생각하고, 적당한 내신 성적을 받는 데에 만족했다. 모의고사를 칠 때면 왜 성적이 오르지 않을까에 대해 고민을 했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나를 보고 공부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지금 생각하면 그냥 공부하는 척을 했던 것 같다. 항상 모범생으로만 살아서 그런지 공부하는 흉내 혹은 공부하는 척은 누구보다 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의 나는 스스로 열심히 공부한다는 생각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고등학교 3년 중 그나마 고3이 됐을 때 수능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내 욕심에 맞는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늦어도 너무 늦었다는 것을 모른 체 부랴부랴 수학 과외도 받기 시작했다. 어찌 됐든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고 싶다는 나의 로망이 아직 자리하고 있었다. 목표는 서울에 있는 대학의 '신문방송학과'였다.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내가 꿈꾸던 모습은 발로 뛰고 머리로 일하는 멋진 커리어우먼의 모습이었다. 그러기 위해 열심히 준비해야 했지만 이미 많은 시간을 공부가 아닌 것에 투자했고, 그나마 고3이 되어서야 '헛바람'만 잔뜩 든 채, 공부하는 척에 심혈을 기울였다. 평소 공부 안 하던 친구들도 분위기에 휩쓸려 공부하게 되는 고3 시절이 아닌가. 새로이 마음을 다잡고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정하는 그 시기에 나 역시 그런 친구들 중의 한 명에 불과했다. 마음은 늘 불안했지만 월드컵과 함께 즐거운 여름을 보냈고, 야간 자율학습시간에 친구들과 놀면서 즐거운 추억만 차곡차곡 쌓았다. 그리고 수능 전 날, 한 숨도 못 자고 시험을 보러 갔다. 결과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얀 종이 위에 까만 점’이라는 말을 언어 시험지를 받아 들고 처음으로 경험했다. 그 이후 시험은 생각나지도 않는다. 어서 시험장을 나가고 싶다는 마음만 간절했다. 답안지 작성 같은 건 하지도 못했다. 수능 시험 다음 날, 담임선생님은 가채점 점수를 제출하지 않은 나에게 다시 풀어보고 채점하라고 타이르셨다. 그날 담임 선생님은 내 점수를 받아보시고는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셨다. 원서를 내지도 말고 재수하라고 하셨다. 그래도 대학교 원서는 제출해보았다. 결과는 3군데 모두 낙방이었다. 그냥 담담했다. 재수는 이미 결정된 사항이었다.
다른 친구들처럼 재수종합학원에 등록했다. 그런데 고3과 똑같은 시스템에 당황을 했다. 학교에서처럼 담임 선생님이 있었고, 전과목에 대한 수업을 들어야만 했다. 그 이후 보충 강의 혹은 자율학습이 이어졌다. 그런데 나는 그럴 수가 없다고 판단했다. 지금 당장 부족한 건 국어와 수학이었다. 일단 그 공부를 하는 게 먼저인데 다른 사회, 과학 같은 공부를 벌써부터 해야 한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등록한 지 한 달만에 재수 학원을 나왔다. ‘너 지금 나가면 분명히 실패한다.’ 학원 문을 나서는 뒤통수에 대고 당시 학원 담임 선생님이 했던 말이다. 당시에는 굉장히 섭섭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에 그러셨으리라 여긴다.
학원을 그만 두고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어회화 수업을 1년 과정을 등록하고, 유명한 국어, 수학 단과 수업을 수강했다. 아침 5시에 일어나서 버스를 타고 동성로에 내렸다. 6시 영어회화 수업을 듣고, 9시부터 12시까지는 수업을 들었다. 수업이 끝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이문열 씨의 삼국지를 읽었다. 오후의 시간은 독서실 혹은 집에서 나 홀로 독하게 공부했다. 그렇게 나의 재수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치열한 시기가 언제였냐를 묻는다면 재수 시절이라고 바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학창 시절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있기 때문일까. 현장에서 공부하지 않는 아이들을 보면 늘 안타까웠다. 학생의 본연의 의무는 공부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초등학교에서 시험을 없애야 한다는 이야기가 돌 때에도 시험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 반 자체에서 수학 단원평가는 필수였다. 수학을 열심히 가르쳤고, 사회 역사도 열심히 가르쳤다. 내가 배운 노하우를 총집결하여 국어를 가르쳤다. 마치 고등학생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듯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딱딱한 선생님이었지만 수업은 최선을 다해하려고 노력했다. 직접 자료를 만들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자료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열심히 가르쳤다. 저학년이든 고학년이든 공부하기를 가장 최우선으로 여겼다. 매 학년 초, 학부모님들과의 첫 만남에서도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 그래프를 그리면서 복습의 중요성과 예습의 효과에 대해 설명하고 아이들의 공부를 독려했다. 학부모님들은 당연히 좋아하셨을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내가 그랬다. 딱 내가 알고 있는 만큼 보였고 그만큼 가르쳤다. 아직 발령받은 지 얼마 안 된 ‘젊은 여자 선생님 시절’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은 딱 그 나이까지 내가 경험한 것들이었다.
‘공부를 잘하면 좋다. 세상은 넓고 잘난 사람은 많다.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음악과 미술은 삶에 필요한 것이다. 책을 읽으면 좋다.’ 나는 이것들을 바탕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내가 살면서 느낀 가치에 대해서 가르치기만 열심히 했다. 정말 열심히 가르쳤다.
그런 덕분이었을까. 우리 반 아이들의 수업태도는 좋은 편이었고, 늘 초롱초롱한 모습으로 수업을 경청했다. 하지만 늘 나를 어려워하는 느낌은 있었다. 주변 선생님들을 보면 아이들이 “선생님~~~”하고 달려와 폭 안기거나 선생님 손을 서로 잡으려고 늘 주변에 아이들로 북적이는 분들이 있다. 특히 저학년 아이들일수록 선생님 주변에 머무르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데, 나는 그런 부분에서는 예외였다. 아닌 척했지만 내 주변에는 왜 아이들이 없을까 조금 속상했던 적도 있다.
물론 알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 앞에서 친절하지 않은 척을 했고, 존댓말을 쓰면서 딱딱하게 굴었다.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대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들한테 검은 뿔테를 낀 사감 선생님처럼 굴었다. 아이들은 나를 좋아했지만 선뜻 내게 다가오지는 못했다. 좀 어려워한다고 해야 하나? 늘 1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내 주위를 맴돌았다. 내가 재미있는 수업을 하고 본인들에게 관심이 많다는 것 정도는 그들도 알고 있었다. 고학년들 같은 경우 여자 아이들만 따로 불러서 또래 상담도 하고 유대감을 형성했다. 여러 명이서 조잘대며 내 근처에 와서 자기들끼리 깔깔대며 웃곤 했지만 왠지 모르게 1대 1로 다가서는 친구들은 드물었다. 나 역시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친구 같은 선생님이 되기보다는 잘 가르치는 선생님임 더 좋은 선생님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5살 된 첫째 아이는 아직도 자다가 한 번씩 나를 찾으며 울 때가 있다. 요즘 새벽 일찍 일어나 자던 방에서 나와 책상에 앉아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있는데, 종종 방에서 울음소리가 들리곤 한다. 서둘러 방에 들어가서 다시 토닥여 주면 잠들긴 하지만 아직 불안한가 보다. 그래도 대성통곡하던 때에 비하면 요즘은 많이 나아졌다. 그런데 오늘 새벽 둘째가 난데없이 깨서는 밖으로 휘적휘적 걸어 나왔다. 자기를 부르는 아빠의 목소리는 들은 채 만채 뒤뚱뒤뚱 걸어 나오는 아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 같이 누웠다. 첫째도 덩달아 깨서는 같이 누워야 한다고 난리를 쳤다. 결국 셋이 한 침대에 누웠고 침대 아래에 누워있던 아빠는 서운한 듯이 중얼대다 다시 잠이 들었다. 첫째는 내 배를 베고 누웠고 둘째는 내 팔을 베고 누웠다. 아직 할 일이 남았지만, 아이들이 언제 잠들지는 모를 노릇이라 그냥 포기하고 자기로 했다. '에휴, 이놈들 언제 크려나...'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몸과 닿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하고 누워있는 아이들을 보니 새삼 '사랑’이라는 단어가 머리 속에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교육들이 아닌 바로 무한한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시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내가 주었던 것은 공부의 팁이었고 열정이었다. 열심히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이 가장 값진 교육이라 여겼다. 그것이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주어야 했던 것은 그것보다 앞서 아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랑'이 어야 했던 게 아닐까 싶다. 아이들에게 늘 '좋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훌륭한 선생님이고 수업을 잘하는 선생님이라 자부심을 느꼈지만 내가 느끼는 것과 아이들이 느끼는 것의 교집합은 과연 얼마만큼의 크기였을까를 떠올리게 된다. 아이들은 너무나 FM 스러운 선생님의 모습에서 친근함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 같다.
지금에서야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이 '사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는 마음. 사랑은 받아 본 사람이 줄 수 있는 것이고, 그 사랑은 전염되는 것이다. 사랑은 가르치려 하는 것이 아니고 무조건 적으로 베푸는 마음인데, 그걸 말로 가르치려 들었으니 아이들이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가르치는 무엇이 아닌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 그리고 주어야 했던 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어야겠다 다시 결심해 본다. 복직하고 새로 만나게 될 아이들에게는 공부하는 법을 강조하기보다는 그저 내가 줄 수 있는 만큼의 '사랑'을 주어야겠다. 학교 오는 것이 힘들고 재미없는 아이들에게 재미를 주는게 어떨까 싶다. 학교 올 맛이 나게 말이다. 그것이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표지 사진 : Photo by freestocks.org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