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작은 가슴 속에서

< 1 장 > 다양한 아이들을 만납니다.

by 이유진

“선생님처럼 두 손을 잡고 팔을 둥글게 만들어보세요.”

“이렇게요?”


아이들이 나를 따라서 손을 맞잡고 가슴 앞으로 동그란 원을 만들면 내가 말을 이어갔다.


“여러분이 만든 이 작은 원 속에 지금 담을 수 있는 것은 아마 농구공 정도 일 것이예요. 지금 여러분이 안을 수 있는 것은 농구공에 불과하지만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그 농구공보다 훨씬 큰, 지구보다 더 큰 가능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이 이 말을 얼마나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항상 아이들에게 본인들이 갖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본인들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해서 학교에서 그렇게 아이들을 대했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못했다. 항상 아이들을 무한한 존재로 대해주어야 했는데, 학교생활을 하다 보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변명 같지만 아이들은 제각각이고 해야 할 일들은 많았다. 모든 아이들의 의견을 수용하기엔 아직 내 그릇이 그다지 크지도 못했다. 좋은 기분으로 시작했다가 여러 가지가 겹치다보면 결국 화로 끝나는 경우도 있었다. 아직 득도하지 못한 인간이었기에 하루에 한 번은 소리를 쳤다.


지금 내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마찬가지다. 고작 5살, 3살 밖에 안 된 아기들인데도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없다. 한 명 추스리면 다른 한 명이 난리다. 참다 참다가 결국 폭발하게 된다. 그리고 잠들기 전에 후회한다. 다행인 것은 요즘은 조금 나아졌다는 것이다. 이 생활에 적응이 되어서 인지 아니면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나의 노력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내 문제점을 직면하게 됐고, 그것을 인정하고 이제는 바꿔야겠다 다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소리치는 일은 많이 줄었지만 한 번씩 불쑥 짜증을 내는 것은 아직 고쳐지지 못했다. 내 아이를 낳고 직접 키워보니 학교에서 가르쳤던 아이들이 종종 생각이 난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결코 만만찮은 일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작은 아이들을 작게만 봐서는 안 됨을 진즉부터 알고 있는 나였지만 지금 내 모습은 좀 그렇지 않아보여 반성하게 된다.



한 사람의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나의 그릇이 커야한다. 작은 아이들의 가슴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 짐작을 하려면 내가 아이들의 마음 속에 있어봐야 한다. 그런데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이미 다 커버린 어른이고 선생님이었다. 늘 옳은 것만을 아이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내가 하는 말은 맞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의 입장을 헤아리기 보다는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은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알파고 같은 선생님이지 않았나? 싶은, 나 스스로 선생님으로서 옳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살고자 노력했으며, 그것을 아이들에게도 당연하다는 듯이 강요했던 것 같다. 동생에게 어떤 선생님이 좋았냐는 질문을 하곤 했다. 그러면 매번 '애들은 칭찬 많이 해주는게 최고야, 난 칭찬 해주는 선생님이 제일 좋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답(나 같은 선생님)만을 찾고서 동생의 그 말은 한 귀로 흘려버렸던 나는 이제야 그 말이 차츰 와닿기 시작한다. 아이들에게 내가 하는 말들이 그저 '잔소리'로 들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반 아이들이 좀 답답했을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들 말이다.



그래도 내가 잘했던 점이 하나 있는데 그건 뭐가 됐든 일단 아이들이 자기 주장을 내세울 때, ‘알겠다’는 말로 수긍해주는 것이었다. 뭐가 됐든 일단은 먼저 공감하고 수용해주는 것이야 말로 최선의 방법이라 믿는다. 물론 아이들의 기분을 다 알아줄 순 없다. 아무리 상대방의 입장을 알려고 노력한들 그 사람이 느끼는 기분을 온전히 느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랬구나’라고 수긍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서로 싸워서 씩씩대고 있는 모습을 보자면 내 입장에서는 정말 별일이 아닐 수 있었지만 당사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그 억울함이 얼마만큼 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세상에서 본인이 가장 억울함에는 틀림없었다. 그리고 내가 가르쳤던 아이 중에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억울한 듯' 늘 울고 고함을 치는 아이가 한 명 있었다. 머리 숱이 많은데다 모발힘이 강해서인지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머리가 빠닥빠닥하게 높이 서 있던 아이. 교실에서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이상은 그 아이와 관련된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은 다양했지만 레파토리는 늘 같았다.


“전 너무 억울해요. 제가 먼저 그런게 아니라구요!”

“알겠어요. 그럼 서로 사과 안할거야?”

“선생님 제가 먼저 사과할게요. OO야 미안해.”

“나는 안 미안해요. 나는 사과하기 싫어요!”

“그래 알았어. 지금 사과 하기 싫음 안해도 돼. 하지만 친구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으니까 한 번 잘 생각해봤으면 좋겠어. 너도 아무 잘못 없는 건 아니잖아. 그렇지? 내일까지 생각해보고 다시 이야기해줘. □□야, 조금 기다려주자. 알겠지?”


매번 이런식이었는데, 우리 반 아이들은 이미 그 아이의 성향을 알고 있었기에 대부분 그 자리에서 사과를 받지 못해도 수긍하고 그냥 돌아섰다. 착한 아이들에게 늘 고마웠다. 그런데 문제는 늘 억울했던 그 아이 역시 참 착한 아이였다는 것이다. 언제나 자기 것을 나누어주려고 하고 친구들과 잘 놀고 싶어 애썼지만 어느 한 부분에서 굉장한 고집을 부려 결국은 문제 상황을 만들었다. 아마 엄마의 영향이 큰 것 같았다. 아이를 여럿 키우는 엄마가 중심을 잡지 못해 아이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형제 3명 중 둘째였던 그 아이는 늘 억울함을 호소하며 생떼를 썼다. 당시 아들 셋을 키우는 그 엄마도 얼마나 힘들었을지 지금에서야 조금 짐작해볼 뿐이다. 엄마도 아이이도 모두 힘들었을 시기. 그것을 뭐라 한다고 해서 아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와 우리 반 아이들은 그 아이를 받아주는 연습을 했다. 아이가 수업 중에 화장실에 갔을 때 우리 반 아이들에게 따로 부탁을 했었다. 그 친구를 위해서 선생님을 좀 도와달라고. 착한 우리 반 아이들은 알겠다고 말했고 실제로 약속을 지켜주었다. 아이가 생 때를 쓰며 울고불고 난리칠 때 마다 나도 아이들도 그 아이를 그냥 받아주는 연습을 하였다. 물론 처음에는 힘들어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아이들도 적응이 된 건지 그냥 받아주게 되었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수긍해주자 고집스럽고 말도 안되던 생떼들이 차츰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과를 하는 빈도도 빨라졌다. 내일까지 생각해보자고 말하면 그 다음 날까지 뾰루퉁하게 있던 아이가 점점 더 사과를 빨리 하게 되고 나중에는 그 자리에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까지 맞이할 수 있었다. 아이의 변화에 나도 놀랐고, 우리 반 아이들도 놀라했다. 그렇게 우리가 아이에게 적응해갈 무렵, 고집이 세던 그 아이는 전학을 가게 됐다. 갑작스럽게 전학을 가게 된 날, 남겨진 아이들도 나도 똑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제 좀 재밌게 지내볼 수 있을까 했는데 떠나버리게 된 아이. 지금쯤 어떻게 자랐을지 궁금해진다.




“나는!”

“잘했다!”

“에이, 목소리가 너무 작은 걸? 오늘 별로 잘하지 못했어요?”

“아니요~~~~!”

“다시 한 번 해볼까? 나는!”

“잘해앴-다!!!!”


종례시간마다 아이들이 집에 가기 직전 외쳤던 구호가 있었다. 내가 '나는'이라고 선창하면 아이들이 '잘했다'를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칭찬에 인색한 내가 어떡하면 아이들에게 칭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짧지만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스스로 자기를 칭찬하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의도였다. 그 시간이 되면 얼굴이 싱글벙글인 아이가 있나하면 빨리 교실을 나가고 싶어 온몸으로 종종거리는 아이들도 있다. 얼른 운동장에 뛰어나가 놀고 싶은 개구쟁이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은근히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어났다. 그리고 그 가운데 본인이 오늘 학교에 와서 잘했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런 아이들 역시 너무 귀여웠다. 때로는 너무 바빠서 그냥 집에 갈 때도 있었지만 이 짧은 시간이 아이들에게 스스로를 칭찬하는 좋은 계기가 된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아이들에게 어떤 효과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수치로 확인할 수 있는 테스트 같은 걸 해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학년이든 저학년이든 자기가 잘했다고 외칠 때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지는 모습을 매번 볼 수 있었다. 물론 외치지 않는 아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다시피 진지하게 고민하는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했다’고 외치는 소리가 교실 한가득 메워야 집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친구들도 끝내는 소리를 치게 된다. 교실에서 합법적으로 그렇게 큰 소리를 외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아이들에게는 즐거운 일이였을 것이다. 그리고 '잘했다'고 외치는 순간 아마 저도 모르게 스스로 반성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은 참 착하다. 아무리 오늘 하루 친구들과 다툼이 있었든, 급식에 나온 시금치를 먹기 싫어서 잔꾀를 부렸든, 아이들은 집으로 가는 그 길에서 비록 잘하지 못했지만 '잘했다'를 외치며 오늘 하루 있었던 잘못한 일을 떠올리고 '내일은 더 잘해야지' 라고 다짐했음에 틀림없다. 나 역시 아이들과 함께 마음 속으로 잘했다를 외치며 그 날 하루를 되집어보곤 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큰 소리로 외치는 그 찰나의 순간, 그날 하루에 있었던 안 좋은 일들은 잊혀지고 기분 좋은 기억만이 남았다. 남은 하루를 즐겁게 마무리 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었던 것이다. 내가 그랬듯, 우리 반 아이들도 그랬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 인지 죽어있던 감수성이 다시 깨어난 건지 요즘 예쁘게 피어있는 꽃들에게 자꾸 눈길이 간다. 그리고 그 꽃들을 바라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아이들이 자꾸 생각이 난다. 아이들의 작은 가슴 속에서는 어떤 꽃들이 피어나고 있을까?


우리 모두 꽃을 피울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꽃을 예쁘게 피우기 위해서는 햇빛과 물이 필요하다. 스스로 양분을 만들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누군가 도와주어야 한다. 그들이 피울 꽃이 어떤 꽃이 되든 소중하게 대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작은 것이라도 소중하게 대할 수 있을 때 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우는 요즘이다. 아이들이 제각기의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우리 아이들의 작은 가슴 속에서 피어날 예쁜 꽃을 기다린다.





*표지 사진 : Photo by Irina Iriser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