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장 > 소중한 삶을 전하려 합니다.
얼마 전 국을 끓이며 간을 맞추다가 그만 혀를 데고 말았다. 뜨거운 국물이라는 걸 알면서도 수저를 급하게 밀어 넣은 탓이었다. 혀 한가운데의 깔끄러움과 얼얼함이 연 이틀 정도 계속되었다. 얼마나 거슬리던지. 아픈 것도 그렇다고 안 아픈 것도 아닌 껄끄러운 그 느낌이 좋지 않았다. 마침 남편이 퇴근길에 동네에서 맛있기로 유명한 붕어빵을 사 왔는데, 데인 혀 때문에 붕어빵의 달콤함을 온전히 느낄 수 없었다. 다 나은 뒤 먹었으면 더 맛있었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자 좀 더 침착하지 못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 이틀 전 아침으로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나는 주로 유모차를 끌고 지하철을 이용하는 편이다. 지하철을 타려면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데, 생각보다 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분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이 할머니 할아버지들인데, 유모차 안에 앉아있는 아기를 한 번 보시고 나 한 번 보시고는 꼭 한마디 씩을 건네신다. 주로 하시는 말씀은 ‘지금이 좋을 때다’인데, 첫째 시완이를 키우면서도 많이 들었던 말이기도 하고, 지금도 아이 둘을 데리고 나가면 종종 듣게 되는 말이다. ‘지금이 좋을 때’라는 말. 먼저 아이를 키워낸 내 친구들조차도 나를 보면 ‘힘들어도 지금이 좋을 때다 너. 나도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 애들이 좀 크고 나니 아기가 너무 예뻐 보여’라고 말한다. 진심으로 귀여워하는 눈빛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말이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지 조금은 느껴진다. 나 역시도 길을 가다가 아기 띠에 쏙 들어가 있는 갓난쟁이들을 보노라면 ‘그래, 저 때가 좋을 때지...’라는 생각이 절로 드니 어떤 마음인지 십 분 이해가 된다.
조지 버나드 쇼는 '청춘은 청춘에게 주기 아깝다'는 말을 남겼다. 그 시절을 지나온 사람들은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 시간이라는 것을 알지만 정작 그 시기에 놓여있는 젊은이들은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말에도 지나간 시절에 대한 후회가 담겨있다. 사람들은 당시에 놓여있을 때는 소중함과 가치를 잘 모른다. 그리고 꼭 지나고 나서 그 시간이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 시간들이었는지를 깨달으며 후회한다. 어찌 보면 인생의 이치란 참으로 단순한 것 같다. 모든 것은 지나고 나면 저절로 알게 되니 말이다.
돌이켜 보면 고등학교 때 엄마와 가장 많이 부딪힌 것 같다. 아마 사춘기였을 것이다. ‘쾅’하는 소리와 방문을 닫고 들어가면 엄마의 협박이 메아리쳤다. ‘너 그렇게 들어갔으면 다시는 나오지 마!’ 엄마가 너무 미웠고 원망스러웠다. 내 방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며 ‘내가 여기서 지금 콱 떨어지면 엄마가 후회하겠지?’라는 생각을 수십 번도 넘게 했다. (당시 10층에 살았었다.) 그게 나에게 모진 말을 하는 엄마에 대한 복수라고 여겼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웃기지만 당시에는 진지했다. 아마 엄마도 그때는 마음의 여유가 없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다. (갱년기였나 싶기도 하고.) 둘 다 서로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은 채 1년 정도를 그렇게 보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힘든 재수 시절을 버텨내고 드디어 대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기숙사 생활이 의무로 정해진 학교였기 때문에 태어나 처음으로 집을 떠나야만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처음 한 달은 너무 낯설어서 혼자서 몰래 많이 울었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집이 그리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친구들도 사귀고 기숙사 생활에 적응했지만 주말에 집에 갔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눈물짓는 시간은 꽤나 오래 지속되었다.
사실 그때부터 집을 떠나 살았던 것 같다. 21살, 처음으로 집을 떠나 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항상 함께 하던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많이 느끼게 되었다. 물론 방학이 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갔지만, 다시 예전처럼 살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았던 것 같다. 그 예감은 사실이 되어갔고, 내가 기숙사로 떠난 지 얼마 안돼 동생은 군대를 갔다. 그리고 전역해서는 나처럼 대학교 때문에 집을 떠나 생활을 해야 하는 관계로 우리 가족 4명이 한 번에 모이는 일은 점점 특별한 일이 되고 말았다.
중학교 때 까지는 아빠 엄마를 열심히 따라다녔다. 매년 여름이면 이모네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다녔는데, 한 번은 욕지도라는 곳에 간 적이 있다. 지금은 유명한 곳이지만 당시에는 사람들을 거의 볼 수 없었던 작은 섬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욕지도는 정말 욕이 나올 것 같은 곳이었다. 왜냐하면 텐트 주변으로 물방개들이 끊임없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당시 가족여행은 주로 텐트를 갖고 다니면서 적당한 장소를 찾아 하룻밤을 보내곤 했다.) 결국 난리를 치는 나의 성화에 못 이겨 텐트를 접고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지금도 한 번씩 그때가 생각나 아빠에게 이야기를 하면 본인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웃으신다. 우리 가족은 욕지도 말고도 이곳저곳 많이 다녔다. 아빠는 평소에는 늘 바빴지만 여름휴가만큼은 우리를 데리고 어디든지 한 번은 다녀오셨다. 아마 당신에게도 꼭 필요한 시간이셨으리라 생각된다.
아빠는 전형적인 가부장의 모습을 갖춘 경상도 사람이다. 엄마한테는 반말을 썼지만 아빠한테는 당연히 존댓말을 썼다. 실제로 회초리를 드는 것은 오히려 엄마였지만 늘 아빠를 무서운 존재로 여겼다. (엄마는 나나 동생이나 잘못하면 무조건 정해진 개수만큼 회초리로 손바닥을 때렸는데, 아빠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아빠는 단 한 번도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하신 적이 없다. 내가 공부를 할 때도 안 할 때도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어서 오히려 나한테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동생도 그렇지만 나는 아빠가 무서웠고, 조금 멀리 떨어진 존재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런 아빠의 진심을 알게 된 사건이 있었다. 사실 아빠랑 부딪힐 일은 거의 없었는데 그날 엄마가 없어서였을까. 아빠랑 처음으로 대판 싸우고 집을 나갔다. 집을 나갔다기보다는 옆 아파트에 살고 있는 단짝 친구와 만나려고 나간 것이었다. 친구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화는 풀어졌고, 또 다른 수다를 떠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가니 거실에 불이 훤히 켜져 있었다. 이미 가족들이 잠든 시간이라 생각하고 조심스레 문을 여는데 거실 소파에 아빠가 아까 내가 나갔을 때 그 모습 그대로 앉아 계셨다. 아빠는 무릎에 팔을 괸 채 고개를 숙인 모습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는지 내가 다가간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빠의 어깨를 흔들었다. 안 주무시고 뭐하냐는 나의 말에 그제야 고개를 드시고는 내 손을 잡으셨다. 아빠 손을 잡은 게 언제인가 싶었다. 공장일 하시느라 험해진 손바닥의 두툼한 살결이 느껴졌다. 어디 갔다 왔냐고 물으셔서 친구 만나고 오는 길이라고 대답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시며 내가 집을 나간 줄 아셨다고 울먹이셨다. 그리고 집을 나서기 전 있었던 일에 대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셨다.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너무 어리둥절했다. 휴대폰을 보니 전화기가 꺼져있었다. 시계를 보니 내가 집을 나서고 벌써 3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러면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기서 이러고 계셨단 말인가. 아빠한테 너무 미안했다. 나는 그때 아빠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아마 내가 20살 때인가 그랬을 것이다. 늘 바쁘고 자식들에게는 관심이 없다고만 생각했다. 어릴 때에는 그냥 무서운 존재로만 여겼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나도 바쁘고 아빠도 바빴기 때문에 별 생각없이 지냈다. 아빠가 예전만큼 무섭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먼 존재임에는 변함없었다. 그런데 울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라니. 당신이 한 말에 내가 깊은 상처를 받아서 집을 나간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3시간 동안 자리를 뜨지도 못하고 그대로 앉아 계셨던 모습에 나는 그 날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간 아빠에 대해 알게 모르게 쌓여있던 응어리 같은 것들이 모두 풀어졌다. 아빠의 진심 어린 사과에 나도 죄송하다고 말씀드렸고, 아까 싸웠던 일은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렸다. 그 이후 아빠와는 편한 사이가 되었다. 아빠와의 대화가 점점 늘어났고, 이런저런 대화 속에서 아빠가 살아온 삶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간 왜 그렇게 하실 수 밖에 없었는지를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가족의 소중함은 느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한 가족이 식탁에 모여 앉아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정말 소중하고 가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흘려보내는 것 같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 당연하다고 느끼는 순간부터는 모든 것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때로는 귀찮고 짜증 나는 것으로 느낀다. 가족이 그 대표적인 대상이 되는 것 같다. 아마 가족의 부재로 인한 크고 작은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가족에 대한 소중함을 더 많이 느끼기를 바란다. 부모님도 마찬가지다. 자식에 대한 사랑을 더 많이 표현해야 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자식이 부모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모든 인간관계에서는 기브 앤 테이크가 존재한다.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주고받는 것이 동등하지 않다고 여겨질 때 갈등이 일어난다. 부모 자식 간에도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른인 부모가 먼저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의 일방적인 제공이 아닌, 우리 아이들이 한 명의 존재로서 인정받고 존중받는 사랑의 경험을 하는 것. 그 경험이 쌓이고 쌓여 아이에게 가치 있는 시간들을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라 믿는다.
어제도 잠이 와서 계속 칭얼대는 둘째를 설거지를 하고 있다는 핑계로 못 들은 채 했다. 어서 끝내고 안아주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서둘러 설거지를 하던 중, 첫째 아이가 동생을 밀쳐버리는 바람에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나도 모르게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아 결국 첫째 아이의 엉덩이를 한 대 때리고 말았다. 나를 빤히 쳐다보다 결국 울음을 터뜨리는 첫째 아이. 이내 나의 행동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나의 화와 짜증을 참지 못하고 애꿎은 첫째 아이에게 방향을 돌린 내 모습이 실망스러웠다. 만약 우리 아이가 이건희 회장의 손자라도 내가 이렇게 아이를 대했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붕어빵을 먹는 순간 이틀 전에 덴 혀를 원망했던 것처럼, 아이 엉덩이를 때리고 아차 했던 것처럼 찰나의 순간에도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는 일이 왕왕 발생한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후회를 하게 될까? 국회의원 안철수 어머니는 아들이 자라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어려서부터 아들에게 항상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 내 자식이라는 이유로 혹은 내 가족이라는 이유로 우리의 가족들을 너무 소홀하게 대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나 역시 이 글을 쓰면서 우리 아이들과 부모님 그리고 남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존재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눈빛을 보냈는지를 돌아보며 말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아름답고 가치 있는 시간들은 나중이 아닌 바로 지금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라 믿기에 오늘도 아이들에게 어떻게 내 사랑을 표현해야 할지를 고민해본다.
*표지 사진 : Photo by Mike Scheid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