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장 > 내 안에 꿈이 있습니다.
“괜찮다. 너무 걱정 말아라. 아빠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시험이야 또 치면 되지.”
최종 불합격 소식을 받고 펑펑 울었다. 침대에 엎드려 울고 있는 나에게 아빠가 뒤통수를 어루만지시며 말씀하셨다. 당신은 오죽 속상했을까 싶다. 그렇게 두 번째로 임용시험에 떨어졌다. 첫 번째 떨어졌을 때는 부끄럽기도 하고 또 너무 속상해서 친구들과의 연락도 거의 하지 않으면서 1년을 보냈다. 재수 때와 같았기 때문이다. 재수를 할 때, 친구들은 갓 대학생이 되어서 새내기의 시절을 보내느라 나와 위치가 달라졌었다. 그들은 그들대로 바빴고 나는 나대로 공부에 충실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재수를 하면서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로 청년의 첫 1년을 보냈다. 그 경험은 새로웠지만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내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소중한 시간들이었지만 그만큼 힘들었다. 친구들은 서울로 떠났거나 혹은 대구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학교가 어디든 대학생이 된 그들의 모습은 달라졌다. 삶의 패턴이 완전히 달라져서 공감대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그들을 차단했다. 그들은 연락을 두절해버린 나에게 서운함을 느꼈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낯설었고 또 부러웠다. 어딘가에 소속되지 못하는 것의 두려움은 느껴보지 않은 자는 아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또 한 번 그런 시간이 찾아왔다.
“언니 교육학 많이 외웠어요?”
“아니, 그 많은 걸 언제 다 외워?”
4학년 때, 같이 교육학 강의를 듣던 동기 동생이 물었을 때, 생각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남들 다 열심히 공부하는 임용고시를 나 혼자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열심히 외우면서 공부했어야 했는데, 너무도 두꺼운 분량에 그냥 슬슬 읽으면서 이해하고 있다는 식으로 공부했다. 당연히 읽으면서 뭐가 이해가 안 되겠는가. 객관식 시험에서 벗어난 지 불과 몇 년 지났다고 벌써 시험이라는 것의 속성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4학년 때는 떨어지는 게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1차를 붙은 것이 용했다. 사실 첫 시험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서울에서 면접을 보기 위해 당시 서울에서 자취하던 친구네 집에 하루 묵었던 기억이 난다. 시험 붙으면 같이 살자고 했었는데, 내가 서울에 합격을 하고 선생님을 시작하게 될 무렵, 그 친구는 결혼을 해서 부산으로 내려가게 된다. 참 아이러니하다. 평생 서울에서 살 것 같았던 친구였는데, 대구도 아니고 부산으로 내려가서 살게 될 줄이야. 인생은 알 수 없다는 말을 절로 실감한다.
그렇게 첫 번째 시험에서 떨어지고, 다시 은둔형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인강을 듣고 독서실에 가거나 집에서 공부를 했다. 간혹 집 근처 학교에서 당일치기 혹은 일주일 정도 자리가 나면 기간제 강사 혹은 교사로 종종 출근했다. 그야말로 단조로운 생활을 했다. 학교에 한 번씩 나갈 때가 아니면 가족 외에는 누구도 거의 만날 일이 업었다. 그랬던 시기에 <무한도전>을 보는 것은 나에게 주는 작은 보상이었다. 일주일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무한도전>을 보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같이 공부하는 동기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스터디를 하고 밥을 먹었다. 그래도 그 시간들이 위로가 되었다. 이렇게 1년간 한 번 더 공부를 하는 것에는 뭔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야기를 스터디 모임에서 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1년 더 공부하는 것에 분명히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분명 이 시간을 통해 얻는 게 있을 거예요.”
“무슨 소리하노, 의미는 무슨. 그냥 1년 버리는 거다.”
내 말에 같은 스터디 멤버였던 동기 오빠는 단칼에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그때는 아니라고 반박했지만, 1년이 지나고 다시 두 번째 시험에 떨어졌을 땐, 그 오빠 말이 맞구나 싶었다. 얻은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3명이었던 스터디 멤버는 1차 시험 후, 면접 스터디를 다시 구성하면서 2명이 더 합류하게 되었는데, 당시 5명 중에서 나만 빼고 다 합격했다. 두 번째는 대구로 지원을 했었고, 면접 스터디를 할 때마다 내가 제일 잘한다며 칭찬을 들었다. 스터디 멤버들조차 내가 떨어진 것에 대해 충격을 받았다.
‘하나님은 이겨낼 수 있는 시련만을 주신다.’
홍정욱의 7막 7장에 나오는 말이다. 이 책을 재수 시절에 읽었는데,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하는 문장이다.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지금도 뭔가 어려움이 닥칠 때면 자연스럽게 저 문장이 떠오르며 이겨낼 힘을 얻곤 한다. 내게 주어진 시간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번째 떨어졌을 때는 오히려 담담했다. 그냥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표가 나고 펑펑 눈물을 쏟긴 했지만 아빠의 말에 위로를 받았고, 그래 지금 당장 굶어 죽는 것도 아닌데 인생 다 산 사람처럼 굴지 말자고 다짐했다. 다시 재수 시절로 돌아가서 우울해지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친구들에게 연락했다. 친구들은 그간 연락을 두절했던 나를 위로해주었고, 따뜻하게 받아 주었다. 못난 사람이었지만 친구들은 모두 큰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사립학교에 근무하던 동기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자기네 학교에 1년 기간제 교사를 뽑는데 한 번 지원해 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대전이었지만 일단 원서를 썼고, 면접을 보고 최종 합격했다. 1년간의 근무를 위해 나는 다시 집을 떠나게 되었다. 때마침 충남대에 합격한 사촌 동생과 함께 그렇게 대전에서 살게 되었다.
재수 때만큼 치열하게 공부하고 열심히 살았던 시절이었다. 아침에 출근하고 집에 오면 5-6시였다. 처음 한 달은 집에 오자마자 뻗어서 잠들었다. 직장생활을 하는 것은 실로 처음이었기에 정신없이 한 달을 보냈다. 처음 출근하고, 처음으로 오롯한 내 반을 담당하게 되었다. 게다가 사립학교의 특성상 행사도 많고 해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모든 것이 새로웠고, 그만큼 정신없었다. 나의 첫 아이들은 4학년이었다. 힘들긴 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재미있었다. 그렇게 두세 달이 지나고는 조금 적응이 되어 슬슬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뭐가 됐든 일단 합격은 하고 보자고 생각했다. 우리 반 아이들로부터 받은 긍정의 에너지가 한몫했으리라 생각한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다. 힘든 시간이었다. 나는 분명히 선생님이었는데,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만 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힘들었지만 그래도 아이들 때문에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파란 하늘이 그 보다 더 파랄 수 없었던 화창한 날이었다. 일요일 오후, 솔솔 부는 초여름의 나른한 바람에 공부를 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울면서 잠에서 깼다. 꿈속에서 엄마를 보았던 것 같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한 번도 꿈꾸다가 울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렇게 꿈에서 깨서는 울면서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다음 날 엄마와 이모가 대전으로 올라왔다. 오랜만에 엄마가 차려준 밥상에 좋았고, 힘을 얻었다. 사촌동생도 엄마를 보니 좋은 듯했다.
하반기가 되었고 시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 번은 교장선생님이 불러서 나보고 자기네 재단에 시험을 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교장선생님 말씀은 정말 감사하지만 일단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교장선생님은 알겠다고 응원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내가 시험을 준비하는 것은 다른 선생님들도 모두 알고 계셨다. 응원을 받았지만 죄송한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공부를 했다.
2009년, 신종플루라는 이름으로 독감이 한창 유행했고, 뉴스에서는 연신 ‘타미플루’에 대해 떠들어 댔다. 평생 감기라고는 몇 번 걸려본 적 없던 내가 어딘가 이상을 느꼈다. 우리 반 아이와 나란히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갔다. 우리는 둘 다 신종플루 진단을 받았다. 의사 선생님은 타미플루가 동이 났을 거라며 구할 수 있는 약국을 따로 적어주셨다. 그 약을 타러 가는 길은 마치 탐정이 된 듯 애가 탔다. 다행히 약을 구할 수 있었고, 아이와 나는 안심했다. 그때는 시험 일주일 전이었다.
“언니, 축하해. 합격이야.”
급식실에서 아이들과 밥을 먹고 있었는데 같은 학교에서 근무 중이었던 동기가 웃으며 속삭였다. 아이들이 있어서 큰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복잡 미묘한 기분이었다. 믿을 수 없기도 했다. 일단은 다행이었다. 정말 기뻤다.
총 3번의 시험을 봤다. 선생님이 되기 위해 3번의 시험을 치르고 마지막에 합격을 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정식 교사가 되는 시험을 드디어 통과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토록 되기를 바랐던 정식 선생님이 되었다. 나는 왜 이토록 먼 길을 돌아왔을까 하는 생각이 무수히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찌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나에게 힘을 준 당시 아이들에게 감사할 뿐이었다. 아쉬운 헤어짐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또 새로운 날들을 맞을 준비를 해야 했다. 이어지는 길이긴 했지만 또다시 새로운 출발선에 서게 된 것이었다.
* 표지 사진 : Photo by Siora Photography on Unsplash
<이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