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길로서의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문신: 우주를 향하여》, 『스페이스 (논)픽션』

by Haim Jung

전시 기간: 2022.09.01~2023.01.29

관람일: 2023.01.24





설 연휴 내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왠지 모를 답답함이 느껴져 무작정 전시를 보러 갔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문신(文信) : 우주를 향하여》였다. 평소 같았으면 집중해서 전시를 보았겠지만, 갑갑함을 떨쳐내려 무작정 가니 전시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전시를 거의 산책하듯 20분 만에 보았다. 술관에서 전시에 집중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는 느낌이 들어 죄책감이 들 뻔했는데, 문득 얼마 전 읽었던 책 구절이 이 날의 내 모습과 비슷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정지돈 작가의 책 『스페이스 (논)픽션』에 수록된 에세이 중 「당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곳 - 미술관과 영화관」이라는 글이 있다. 이 글은 화이트 큐브에 대한 작가의 숭배에 가까운 기억으로부터 시작해서 미술관과 영화관의 새로운 공간적 가능성을 제기하며 끝난다. 새로운 공간적 가능성이란, 두 장소를 감상을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공의 거실 같은 장소로 이용하는 것이다. 작가 본인에게 미술관과 영화관은 갑갑한 자취방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 도시 속의 거실 같은 공간이었다. 꼭 감상만을 목적으로 방문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스페이스 (논)픽션』 본문

이 에세이가 정말 많이 공감됐다. 예전에 최근 전시장이 SNS용 사진 스튜디오가 되었다는 내용의 글(링크)을 쓴 적이 있는데, 이처럼 미술관에 사진 배경을 구하기 위해 오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작품을 보러, 어떤 사람은 가까운 사람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왔을 수도 있다. 내 경우는 넓고 조용한 공간에 있고 싶어서다. 고등학생 때부터 넓고 조용한 공간에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 조용한 공간에서 무언가에 집중하는 시간을 즐겼고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되도록 평일 오전에 미술관에 가는 것을 선호한다. 운이 좋으면 전시를 보는 내내 스태프 외에 사람을 한 명도 마주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가끔 평일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많은 날이 있는데, 이런 날은 왠지 심통이 난다.

연휴 때의 나는 내내 가족들과 붙어 있는 것이 갑갑했다. 그래서 일단 물리적으로 떨어져 나와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한 곳으로 갔다. 연휴 마지막 날 오후의 전시장에는 사람이 북적였지만, 그저 환기할 공간이 필요했을 뿐이라서 사람이 많든 적든 상관없었다. 전시장의 분위기만 쓱 훑고 나오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전시를 이렇게 간단하게 본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런데도 공간만큼은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정말로 아무 정보도 얻지 않고 나오는 것은 마음에 걸려서 퍼져있는 정신을 부여잡고 공간과 작품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다. 설명 중 '문신의 조각은 그 형태는 즉흥적이지만 마감은 무척 섬세하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 점이 공간에서도 잘 보이고 있었다.

전시 전경

조각을 올려두는 좌대는 문신의 조각처럼 비정형적인 곡선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형태는 자유롭지만 이들은 전시장의 기둥과 어우러지고, 관객의 동선을 확보하며, 최대한 합판이 버려지지 않는 곡선의 각도를 고려한 섬세한 형태를 갖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공간 디자인의 과정을 예측해 보자면, 일반적인 사각형의 좌대는 문신의 자유로운 조각과 어울리지 않으니 문신의 조각을 닮은 자유로운 형태로 제작하고자 했는데, 합판을 곡선으로 자르면 버려지는 부분이 많으니 이를 최대한 줄이고자 최대한 많은 부분을 활용할 수 있는 형태로 합판을 자르지 않았을까 싶다. 짧게 감상한 전시지만, 그 찰나 동안에도 작품에 대한 고민이 시각적으로 잘 드러났던 좋은 공간이었다.

전시 전경



성인이 된 후 독서량이 급격히 줄었다가 작년부터 다시 회복하고 있다. 일상 속에서 책에 집중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책에서 읽은 내용을 전시 보다가 발견하는 일이 늘고 있다. 직전에 쓴 《최우람: 작은 방주》 리뷰 역시 그런 경우다. 평소 전시장에서 작품-작품, 작품-디자인, 디자인-기획···처럼 전시를 이루는 요소들 간의 관계를 생각하며 보는 것에 더해, 이들을 다른 장르와 연결 지어 감상하는 기분이 무척 좋다. 서로 다른 것들이 연결되는 지점을 발견할 때면, 드넓은 예술 생태계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는 것 같아 나 역시 좋은 기운을 받게 된다.





전시 공식 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