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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im Jung Mar 13. 2023

미친 것들은 오스트리아에서 온다

수원시립미술관 《에르빈 부름: 나만 없어 조각》

전시 기간: 2022.12.07~2023.03.19

관람일: 2023.02.23






에르빈 부름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조각가다. 작가가 오스트리아 출신인 것을 보고 뭔가 독특한 조각가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생각했다. 최근 트레바리 독서 모임에서 독일 문학을 읽고 있는데, 클럽장님 말씀에 따르면 문학계에서는 '미친 것들은 오스트리아에서 온다'는 말을 왕왕한다고 들었다. 기존과 다른 성향으로 문단에 놀라움을 안겨주는 성향의 작가 중 오스트리아 출신이 많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뒤로 오스트리아라고 하면 터지기 직전의 강렬한 에너지를 한껏 참고 있는 듯한 이미지가 떠오르게 되었다. 어쨌든 에르빈 부름도 오스트리아 출신이니 그런 성향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기대했던 것처럼 자기만의 조각관이 꽤나 독특한 작가였다.

     작가는 조각을 꼭 양감 있는 덩어리를 깎아내어 만드는 전통적인 장르라고 생각하지 않고, 형태가 변하거나 부피가 증감하는 모든 '현상' 자체를 조각이라고 본다. 그래서 작가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형태가 바뀌는 인간의 신체도, 부피가 증감하는 모습이 연상되는 회화도 모두 조각이라고 정의한다. 전시는 총 3부로 구성된다. 1부에서는 다양한 공산품의 부피가 증감한 형태의 작품을 통해 자본 과잉 시대에 대한 비판을, 2부에서는 에르빈 부름의 대표 조각 시리즈인 '1분 조각' 시리즈를 통해 '형태가 변하는 현상으로서의 조각'을, 3부에서는 회화와 사진 등 조각의 정의에 관한 작가의 최근 연구작들을 선보인다.



[1부. 사회에 대한 고찰]

     1부에서는 일상적인 공산품이 비정상적으로 커지거나 살찐 모습을 볼 수 있다. 빌딩 모형은 부풀어 올라 똑바로 서 있지 못한 채 휘어 있고, 울룩불룩 부풀어 오른 자동차 모형은 꼭 지방층이 튀어나온 것 같다.

〈팻 카〉, 〈멜팅 하우스〉

다양한 공산품 중 특히 우리 신체와 가장 가까운 공산품인 '옷'에 관한 작업의 비중이 높았다. 우선 〈8일 만에 L 사이즈에서 XXL 사이즈 되는 법〉은 그렇게 되는 방법이 쓰인 두꺼운 책이다. 책에서는 늦잠 자기, 최대한 느리게 움직이기, TV 보며 간식 먹기와 같이 살을 찌우기 위한 행동 지침을 내린다. 이 작품 바로 옆에는 〈18 풀오버〉라는 영상 작업이 있는데, 이 작업은 어떤 남자가 옷을 다섯 겹이고 여섯 겹이고 입을 수 있을 때까지 겹겹이 입는 모습을 촬영한 작업이다. 내용에 비해 필요 이상으로 두껍고 큰 책과 필요 이상으로 옷을 껴입는 영상 속 인물은 서로 닮았다. 물질 과잉 시대의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비고 있다.

〈8일 만에 L 사이즈에서 XXL 사이즈 되는 법〉
〈18 풀오버〉


[2부. 참여에 대한 고찰]

     2부에서는 작가의 대표 작업인 '1분 조각' 시리즈를 볼 수 있다. 1분 조각은 어떤 구체적인 형태가 있는 조각 작품이 아니다. 작가는 관객에게 어떤 행위를 하도록 지시한다. 전시장 곳곳에 작가가 직접 글과 그림을 드로잉한 지령이 적혀 있고, 그 옆에는 지령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공산품들이 놓여 있다. 예를 들면 '머리, 양 무릎, 양손을 사용해 5개의 수세미를 벽에 붙이기' 같은 지령이다.

'1분 조각' 시리즈

이 지령을 수행하다 보면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취하게 되고, 물건을 떨어뜨리기도 하면서 전시장이 왁자지껄해진다. 전통적인 미술관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놀이터 같은 분위기가 돈다. 처음 지령을 읽고, 혼자 전시를 보면서 머쓱해진 나는 지령을 수행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친구들과 함께 온 다른 관객들은 너도나도 다 같이 작가의 지령을 수행하고 서로 사진과 영상을 찍으며 스스로 조각이 되고 있었다. 전시에 대한 관심이 정말 많은 사람이라고 자부했는데 정작 이 전시를 가장 즐기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나라는 게 충격이었다. 더불어 사람이 적은 평일 오전에 갔어도 이와 같은 풍경이 펼쳐졌을까, 하는 의문이 들면서 사람이 많은 오후 시간대에 간 것이 무척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1분 조각' 시리즈


[3부. 상식에 대한 고찰]

     3부에서는 조각의 정의를 넓혀가는 작가의 새로운 시도를 볼 수 있다. 작가는 사진을 통해 사람들에게 행동 지침을 내리고, 형태가 부풀어 무슨 뜻인지 읽기 힘든 단어들을 회화로 그려낸다(아래쪽 가운데 사진 속 글자는 SOFT). 그리고 속은 빈 채로 외피만 있는 조각을 통해 형태를 결정짓는 껍질 역시 조각이라는 '스킨 조각' 시리즈를 선보인다.

사진, 회화, 조각에서의 새로운 시도



전시를 보고 나면 크게 두 가지 생각이 든다. 하나는 작가가 '신체'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는 것. 1부에서는 신체와 가장 가까운 공산품인 '옷'을 통해 사회 현상을 이야기하고, 2부에서는 신체 자체가 작품이 되며, 3부에서는 신체에서 눈에 보이는 부분인 '외피(스킨)'를 주제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하나의 소재가 변용되며 작가의 작업 생애를 관통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사순절 천〉. 전시장 1~2층의 층고보다도 긴 작품으로, 옷과 신체라는 작가의 중심 소재를 거대한 부피감으로 보여준다.

     다른 하나는 작가의 대표작인 '1분 조각' 시리즈가 상당히 SNS 시대와 어울리는 작업이라는 것. 관객은 1분 동안 작가가 지시하는 엉뚱한 지령을 수행하면서 이 모습을 자연스럽게 촬영하고 SNS에 공유한다. 1분이라는 짧은 시간 자체도 숏폼 콘텐츠로 쓰기에 적절하고, 무겁지 않고 유쾌한 분위기도 SNS에 공유하기 최적화된 콘텐츠다. 도록을 보니 작가가 1분 조각 시리즈를 처음 발표한 것은 1996년으로 아직 SNS가 등장하기 이전 시대인데, 우연의 일치가 정말 잘 맞아떨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 도록 일부

     어떤 기대가 있기 보다는 집에서 가까운 전시를 보려고 방문한 곳이었는데, 예상을 뛰어넘 전시를 즐기는 관객들의 태도에 적잖이 놀란 시간이었다. 평소 최대한 고요한 방식으로만 전시를 보았던 내 태도를 반성하고, 내 방식이 늘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는 경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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