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 트리스탄 베니스에서의 죽음』 독후감
트레바리 '이참에 읽자' 북클럽, 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 트리스탄 베니스에서의 죽음』
[개요]
20세기 독일 문학의 거장 토마스 만의 초기 단편 8편을 수록한 단편집. 토마스 만은 초기, 중기, 후기의 작품 세계가 뚜렷하게 다른데, 초기 단편들의 특징은 시민성과 예술성의 대립에 관한 고민을 깊이 다루고 있다. 이 주제는 실제로 시민성을 대변하는 아버지와 예술성을 대변하는 어머니를 가진 토마스 만 자신의 배경으로부터 출발하게 된 주제다.
토마스 만의 단편 8편 중 4편의 작품이 선택되었다. 선택되지 않은 4편 중 「타락」, 「행복에의 의지」, 「어릿광대」는 초기 중에서도 더 이른 시기의 작품들로 절망적인 분위기나 모티프의 사용과 같이 이후 더 섬세하게 표현될 토마스 만 식 기법의 예고편이 되고, 「마리오와 마술사」는 정치적으로 각성한 이후의 작품이라 이전 작품들이 자신의 예술 세계를 표현한 것과 달리 정치적 비판이라는 명확한 주제를 다루는 다른 성격의 단편이다. 따라서 선택된 4편의 작품들은 토마스 만의 젊은 시절, 그의 문체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후 그의 기량을 마음껏 펼쳐놓은 1차 메인 요리라고 할 수 있겠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토마스 만의 예술 세계 또한 변했기에, 책에 편집된 순서보다는 토마스 만이 실제로 쓴 순서를 따라 각 단편들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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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키 작은 프리데만씨」(1898년 작)-고독
프리데만 씨는 태어난지 한달만에 보모의 실수로 바닥에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다. 사고 후유증으로 그는 뒤틀린 신체를 갖게 되고, 그래서인지 어린 시절부터 왠지 모르게 또래로부터 겉돌게 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는 신체 때문이 아니더라도 타고나길 고독을 즐기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그는 타인에게 무관심한 채 자신의 인생 마저 외면하는 자신의 인생을 홀로 사랑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통마저도. 인생은 그것을 살아내는 인간이라는 주체가 선행되어야 존재할 수 있는 객체인데, “자기를 외면한 채 슬며시 흘러가고있는 이 인생(p.268 밑에서 5번째 줄)”이라는 표현은 객체가 주체를 외면하는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다.
이런 고요하고 우울한 프리데만 씨의 인생에 폰 린링엔 부인은 강렬한 변화를 가져다 주는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프리데만 씨에게 정신적 구원과 굴욕을 동시에 안긴다. 폰 린링엔 부인의 놀이에 탈진한 프리데만씨는 물가에 쓰러진 채로 그의 상체를 쳐들고 ‘그것을’ 물 속으로 떨어지게 하여 더이상 인생을 붙잡지 않는다. 마지막의 자살 장면은 ‘프리데만 씨가 그의 상체를 쳐들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아닌, ‘그것을’ 물 속으로 ‘떨어지게’ 한다는 식의 타자적인 시선으로 표현되었다.
이렇게 주인공 프리데만 씨의 정신과 신체를 외부에서 바라보는 문체는 자기조차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할수 없으며, 예술가는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의 내면을 탐독해야만 그 세계를 예술로 발현할 수 있다는 고독한 경향을 강화한다.
[2] 「트리스탄」(1903년 작)-대립(시민성과 예술성)
「키 작은 프리데만 씨」가 예술가의 고독한 내면을 다루었다면, 다음 작품인 「트리스탄」에서는 내면의 고뇌가 서로 상반되는 다양한 모티프들을 통해 시민성과 예술성의 대립이라는 작가만의 구체적인 주제를 암시하게 된다. 아인프리트 요양원에서 지내는 슈피넬 작가는 새로 요양원에 머물게 된 클뢰터얀 부인을 짝사랑하게 되면서 그녀와 자주 대화를 나눈다. 그중 이름에 관한 대화에서, 슈피넬 작가는 그녀의 결혼 전 이름을 묻는다. 그러면서 그녀의 아버지가 음악을 즐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작가는 그 사실을 몹시 반긴다. 부인의 원래 이름인 에크호프는 예술성을, 결혼 후 이름인 클뢰터얀은 시민성을 상징하며 시민성에 대한 토마스 만의 적대감을 드러낸다.
이후 부인에게 피아노 연주를 부탁하는 장면에서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가져온 낮과 밤의 모티프를 슈피넬 작가의 내면에 적극적으로 투영시킨다. 낮과 밤 모티프는 마지막 장면에서 토마스 만의 시민성과 예술성 모티프로 확장된다. 며칠 뒤 슈피넬 작가는 클뢰터얀 부인에 대한 사랑과 그런 고귀한 여인을 시민 세계로 끌어들인 클뢰터얀씨에 대한 분노로 클뢰터얀씨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는데, 그는 편지에서 클뢰터얀씨를 천박한 미식가, 입맛을 아는 농사꾼이라고 모욕한다. 이 대목에서 토마스 만은 미각을 시민의 저급한 사랑으로 취급하는데, 다른 단편들에서는 후각을 예술가의 순수한 사랑을 상징하는 요소(주위의 모든것이 달콤하고도 후텁지근한 향내로 푹 젖어 있었다_p.291 11번째 줄, 그는 벤치에 풀썩 주저앉아, 제정신을 잃은 채 식물들이 뿜어내는 밤의 향기를 들이마셨다_p.492 밑에서 5번째 줄)로 사용해 두 감각을 대비시킨다.
그러나 편지를 받은 클뢰터얀 씨가 슈피넬 작가를 찾아와 따질 때 작가는 제대로 된 반박 한마디 하지 못한다. 한바탕 치욕스러운 상황을 겪은 슈피넬 작가는 숨을 돌리려 산책을 간다. 산책길을 걸을 때 해가 중천에 뜨기 시작해 슈피넬 작가는 해를 바라보지 않음으로써 시민성을 거부하는데, 산책길은 의도치 않게 해를 마주보는 쪽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길 한가운데에는 에크호프 부인의 아들이 하녀가 끄는 유모차에 타고 있다. 그에게 있어 가장 거부감이 드는 시민을 마주한 슈피넬 작가는 그렇지 않은 척 도망가고 만다. 이름, 감각, 낮밤의 대비는 결국 토마스 만을 대표하는 시민성과 예술성의 대립이라는 주제로 귀결된다.
[3] 「토니오 크뢰거」(1903년 작. 같은 해 출간된 책 「트리스탄」에서 맨 마지막에 수록)-시민성과 예술성(대립)
「트리스탄」에서 다양한 모티프로 암시되던 시민성과 예술성의 대립은 「토니오 크뢰거」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토니오는 어릴 적, 침착한 가운데 무엇인가 완벽한 것을 창조해 내는 것보다는 풍요롭고 생기 있게 되기를 동경하고 있었(p.24 두번째 문단 마지막)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그는 자신의 근본을 부정하고 침착하고 완벽한 정신과 언어의 힘(p.36)에 모든 것을 바치면서 내적 방황에 접어들게 된다.
근본적인 방황을 내면에 품고 작가로 성장한 토니오는 연인 리자베타에게 예술가의 고뇌와 삶에 대한 경탄을 이야기하는데, 그중 언어에 관한 생각은 시민과 예술가를 구별짓는 명확한 기준으로 등장한다. 그는 언어란 인간의 감정을 분석하고 공식화하여 정리하기 때문에 이는 인간의 감정을 차갑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속성을 가진 언어를 또다시 작품으로 재조합하는 예술가는 더욱 차가운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의 생각은 소설 초반과 후반의 대비되는 두 경험으로 구체화된다. 어린 시절 잉에보르크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해 토니오는 ‘그의 언어는 그녀의 언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p.33 9번째 줄)’고 표현하고, 성인이 되어 고향을 다시 찾아갔을 때 한스와 잉에보르크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토니오는 또 다시 ‘그들의 언어는 그의 언어가 아닌 것이다(p.101 4번째 줄)’라고 말한다. 결국 토니오는 본래 가지고 태어난 풍요롭고 생기있는 따뜻한 감정을 차가운 언어로 다듬는 삶을 살게 되면서 필연적으로 길을 잃은 시민, 두 세계 사이에 서있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4] 「베니스에서의 죽음」(1912년 작)-합일
30대에 이르러 작가로서 한층 성숙한 토마스 만은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내면의 대립을 뛰어넘어 합일에 이른 예술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대중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모두 성공한 예술가인 아셴바하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업적주의 도덕가들의 시인이다. 그는 자신을 이러한 성공으로 이끈 규칙적인 생활을 고수하다가 어느날 의문의 남자를 보고 마음의 변화가 일어 베니스로 여행을 떠난다. 베니스에서 마주친 젊은 화장을 한 늙은이와 우울한 날씨의 항구 도시는 묘하게 불안한 느낌을 주지만, 그는 다시금 도시 풍경에 빠져든다.
호텔에서 우연히 타치오라는 아름다운 소년을 마주하게 된 아셴바하는 그 외모에 한순간 반한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시인으로서 어린 소년에게 다가갈 수 없는 아셴바하는 멀리서 바라보는 사랑을 택한다. 아셴바하에게 루틴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작품의 원천이자 그를 성공으로 이끈 그의 정신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삶의 요소다. 그런 아셴바하가 ‘규칙적으로’ 그 고귀한 인물을 집중하여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느긋한 기회(p.477 11번째 줄)를 가질 정도로 타치오를 사랑하는 것이다. 아셴바하는 전염병이 돌아 관광객들이 도시를 떠나가는 와중에도 도시에 남고, 여행 초반 이상하게 본 늙은이처럼 자기 역시 젊게 화장을 하는 등 규율로부터 벗어난 행동들을 한다. 열렬한 사랑에 빠졌던 아셴바하는 결국 타치오를 바라보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의 ‘약속으로 가득 빛나며 덮칠 듯한 무시무시함(클럽장님 번역)‘으로 이끌리는 아셴바하의 모습은, 작가로서 추구해야 할 그 다음의 알 수 없는 세계를 향하는 듯하다. 여행 전 마주친 의문의 남자와 여행에서 마주한 타치오는 정신적으로 충만한 아셴바하를 그 다음 여정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인 것이다. 작가 연보에 따르면, 마침 「베니스에서의 죽음」 바로 다음에 출간한 작품이 「한 비정치적 인간의 고찰」인데 토마스 만은 이를 계기로 형 하인리히 만과 정치 논쟁을 벌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정치적으로 각성해 이후 사회적 성격을 담은 작품을 쓰게 된다. 그는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쓰면서 성공한 작가로서의 자긍심과 더불어 그 다음에 대한 고민을 함께 했었던 것 같은데, 내면의 충만함을 이룬 후 외부 세계로 눈을 돌릴 여유가 생기면서 정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이후 형제 논쟁을 통해 각성하며 한층 성장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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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4개 단편은 고독으로 시작되는 예술가 정신이 다양한 가치들의 대립으로 이어지고, 이는 시민성과 예술성이라는 큰 주제로 귀결된다. 그리고 시민성과 예술성의 합일로 내면적으로 충만함을 얻은 작가는 이후 외부 세계를 그의 내면에 편입한다. 내면에서 시작된 토마스 만의 고뇌는 서로 다른 두 내면 세계가 합일을 이루고 합일된 내면은 그에 속하지 않았던 외부 세계를 다시 아우르는 정반합의 과정을 거치며 더 큰 작품 세계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