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하지 않는 디자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재난과 치유》
전시 기간: 21.05.22~21.08.01
관람일: 21.06.03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팬데믹에 관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전시는 팬데믹 상황을 기록하는 것부터 시작해 우리의 새로운 일상들을 보여주고, 이 상황을 초래한 우리의 지난 행적들을 되돌아보는 순으로 마무리한다. 제목의 ‘치유’라는 단어는 우리를 위한 정신적인 위로를 뜻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그동안 자연에 가한 위협에의 치유를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전시디자인에서도 물리적인 가공을 최소화한 점이 눈에 띄었다. 각 작품에 대한 해설은 리플렛에 상세히 나와 있어서 나는 전시 공간과 관련된 작품에 집중해보았다.
‘1. 징후와 증상’에서는 두 개 작품이 서로 상호 보완적으로 전시된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기둥을 둘러싸고 있는 긴 그림이 있었는데, 이 그림을 감상하며 기둥을 중심으로 빙 돌면 그림이 끝나는 지점에서는 기둥에 걸린 작은 큐브 형태의 작품이 이어져 나온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왜소한 크기의 이 작품은, 기둥을 중심으로 한 동선과 기둥 자체를 액자로 사용한 덕분에 스케일이 큰 다른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왜소해 보이지 않게 된다.
감싸고 감싸지는 두 작품 '2. 집콕, 홀로 같이 살기'는 아래층에서 감상할 수 있는데, 내려가는 계단의 높은 층고에 불안감이 느껴지는 형상의 작품을 설치해 사회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이후에는 다시 원래 층으로 올라와서 건너편에 있는 전시실로 이동하게 된다. 챕터 3 바로 앞에 있는 '금지된 걸음'이라는 영상은 가운데 입구는 좁고 스크린과 가까워질수록 폭이 넓어져서, 처음에는 영상의 가운데 부분만 보이던 작품이 가까이 걸어갈수록 서서히 드러난다. 전시장 외부에 있어 자칫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는 작품을 벽을 활용해 강조하면서도 외부로부터의 소음을 최대한 차단하는, 그러면서도 작품에 가까이 걸어가며 서서히 드러나는 영상을 통해 제목인 '금지된 걸음'을 직접 느낄 수 있는 일석삼조의 해결방안이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3. 숫자와 거리'는 '4. 여기의 밖, 그곳의 안'과 같은 공간에 설치되어 있어 두 챕터 사이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2, 3, 4 섹션 모두 거리에 대한 주제이지만 2가 '연결'이라는 주제에 더 가깝다면 3, 4는 정말로 '물리적 거리'에 관한 내용이기에 두 챕터는 상당히 연관성이 있다. 그래서 이 공간은 거대한 벽들이 서로 겹쳐 있고 그 사이를 들락날락하면서 두 챕터의 작품을 관람하게 된다. 이때, 벽의 서로 겹치고 가까워지는 부분들을 통해 다른 공간까지 넘어다볼 수 있게 해서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다양하고도 복잡한 거리를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마지막 '5. 유보된 일상, 막간에서 사유하기'는 인간이 자연에 행해온 행태들을 반성하고 앞으로의 발전 방향에 대해 고민하게 했던 만큼 디자인적으로 친환경적인 노력이 돋보였는데, 가벽 중 일부를 얼마 전 국현 과천관에서 막을 내린 전시 《올림픽 이펙트: 한국 건축과 디자인8090》에 사용된 벽을 활용했다. 이렇게 전시 구조물을 재활용하는 사례를 실제로 본 것이 처음이라서 인상적이었다.
사진 속 어두운 공간에 조각보처럼 이어진 재활용 가벽이 보인다.
최소한의 가공으로 공간을 디자인한 맥락과 같게 리플렛도 가공을 줄인 비도공지를 사용했고, 작품 중에서도 전시장 자체 벽에 그려지거나 액자 없이 그대로 벽에 설치된 캔버스 작품이 있기도 했다. 초반에 전시를 보면서는 비교적 담백하게 디자인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주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알고 나니 구조물 하나하나가 전시의 뼈대처럼 단단해 보이고, 앞으로 내가 디자인할 때도 환경을 고려하는 자세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전시는 대상을 비교적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 있는 과거의 것을 다루는 경우가 많은데, 펜데믹이라는 특수한 상황 덕분에 전시를 통해 현재 상황을 살펴보고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