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독일문학 독서모임에서 지금까지 20권 남짓의 책을 읽었다. 지금까지 읽은 작가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변신』으로 유명한 프란츠 카프카다. 독서모임에서 카프카의 장편 소설 『소송』과 단편 소설 『변신』, 『선고』를 읽으면서 작업의 한 꼭지로 삼을 만한 키워드를 발견하게 되어 개인적으로 무척 의미있는 작가다.
카프카는 평생동안 권위적인 아버지와의 관계로 고통 받았지만, 역설적으로 그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글쓰기에 매진하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에게 카프카는 원고지로 400장 가까이 되는 엄청난 분량의 편지를 썼다. 방대한 분량의 편지는 카프카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큰 단서가 되고, 그 자체로 문학성을 인정받기도 해서 책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로 출간되어 있다. 나는 카프카와 다른 방향이긴 하지만 아빠와의 관계에 있어 나름의 고민을 가지고 있어서 이 편지를 읽어보고 싶었다.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는 현재 구할 수 있는 국내 판본이 3종류였는데, 나는 1999년에 번역된 문학과지성사 판본을 골랐다.
0순위(원문):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 올라온 글을 기준으로 했다.
https://www.projekt-gutenberg.org/kafka/vater/vater.html
1순위: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이재황 번역, 문학과지성사, 1999년
문장 요소들의 순서가 원문과 비슷했고 원문에 쓰인 단어들 외에 번역 과정에서 추가되는 단어들이 최소한으로만 사용되었다. 번역가가 가장 개입을 덜 했다고 느꼈는데, 덜 했다고 대충 했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독일어와 한국어를 최소한의 개입만으로 연결하기 위해 음절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선택했을 것 같다는 의미다.
번외로 가로에 비해 세로 길이가 긴 판형, 얇아서 한 손에 쥐기 쉬운 가벼운 디자인이 편지라는 형식에 가장 가까워서 마음에 들기도 했다. 번역으로 보나 디자인으로 보나 원작을 최대한 살리겠다는 방향성이 느껴져 가장 마음에 들었던 판본이다.
2순위: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정초일 번역, 은행나무, 2024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3673661
문장 요소들의 순서는 원문과 어느정도 비슷했지만, 독일어를 한국어로 바로 번역했을 때 다소 함축적이라고 느껴질 수 있는 부분들을 풀어 썼다. 같은 문장을 읽었을 때 문학과지성사 판본은 독자가 의미를 조금 더 생각해야 한다면, 은행나무 판본은 바로 의미가 와닿아서 더 몰입감 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당시 시대상을 이해하기 쉽도록 각주를 달아놓은 것도 독자의 몰입을 위한 장치다.
은행나무 판본은 일반적인 단행본과 비슷한 안정적인 비율에 약간 작은 판형, 양장 제본을 하고 있어서 카프카의 상처받은 마음을 감싸주는 듯한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번역이나 디자인에 있어서 독자가 카프카의 마음에 더 공감갈 수 있도록 하는 방향성이 느껴졌다.
3순위: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박환덕 번역, 범우, 2018
3개 판본 중 번역이 가장 많이 개입한 판본이었다. 원문의 의미를 풀어쓴 만큼 이해가 쉬울 수는 있지만 그만큼 원문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고 생각했다.
책에 나오는 3개 문장을 원문 및 3개 판본과 동시에 놓고 비교해 보았다.
1. 독일어 원문
Du hast mich letzthin einmal gefragt, warum ich behaupte, ich hätte Furcht vor Dir.
너(아버지)는 최근에 내게 물었다, 왜 내가 주장하는지, 내가 너(아버지)를 두려워하는 것을.
-1순위. 문학과지성사
전에 언젠가 제게 물어보셨지요, 어째서 제가 아버지한테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말을 하느냐구요. (9쪽)
-2순위. 은행나무
최근에 아버지께서 제게 물어보신 적이 있지요. 제가 아버지를 무서워한다는 말을 하곤 하는데,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요. (7쪽)
-3순위. 범우
제가 아버님을 무서워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이냐고 아버님은 최근에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11쪽)
2. 독일어 원문
Nur eben als Vater warst du zu stark für mich,
너(아버지)는 오직 아버지로서만 내게 너무 가혹했다.
-1순위. 문학과지성사
아버지가 바로 아버지일 때에만 아버지는 저한테 너무 강한 분이셨습니다. (16쪽)
-2순위. 은행나무
아버지는 오직 아버지로서 저를 대하실 때만 지나치게 엄격한 분이셨어요. (13쪽)
-3순위. 범우
단지 아버지로서는, 아버님은 제게 너무 강하셨습니다. (16쪽)
3. 독일어 원문
Noch nach Jahren litt ich unter der quälenden Vorstellung, dass der riesige Mann, mein Vater, die letzte Instanz, fast ohne Grund kommen und mich in der Nacht aus dem Bett auf die Pawlatsche tragen konnte und dass ich also ein solches Nichts für ihn war.
몇 년이 지나도 나는 고통받았다, 고통스러운 상상 아래에서, 그것은 거대한 남자가, 내 아버지, 최후의 심판인, 거의 이유도 없이 와서 나를 밤에 침대 밖의 파블라취로 끌고갈 수 있었다는, 그리고 나는 그에게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1순위. 문학과지성사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고 나서까지도 저는 고통스러운 관념 속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어느 날 밤 거인의 모습을 한 아버지가 느닷없이 최후의 심판관이 되어 나타나서는 나를 침대에서 들어내 파블라취로 끌고 나갈 수도 있다, 그만큼 나란 존재는 아버지한테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라는 관념이었지요. (26쪽)
-2순위. 은행나무
그 후 몇 년이 지나도록 저는 고통스러운 생각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몸집이 거대한 남자, 최고의 권위를 가진 심판자인 나의 아버지가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는데도 어떻게 나를 침대에서 들어 올려 복도로 내칠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나는 아버지께 그토록 아무것도 아닌, 하잘것없는 존재였구나. 이런 아픔에 부대꼈던 것입니다.(19쪽)
-3순위. 범우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후에도 거인 같은 남자가, 즉 아버님이 - 그것은 최후의 판단이기도 한데 - 별 이유도 없이 나타나서는 밤중에 나를 침대에서 긴 마루로 떠메고 나갈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에 괴로워하곤 하였습니다. 그것은 결국 제가 아버님에게 그처럼 가치 없는 존재라는 말도 되는 것입니다. (22~23쪽)
독서모임을 하면서 늘 원문이 아닌 번역본을 읽을 수 밖에 없어 생기는 한계가 아쉬웠다. 그리고 원문을 전혀 읽지 못하니 내가 읽은 번역본이 잘 번역된 책인지, 내 번역 취향에 맞는 책인지도 알 수 없었다. 독일어를 배운 후 직접 원문과 번역본을 비교해 보니 번역가들마다 번역의 방향성이 다르고 그로 인해 하나의 원문도 수없이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이제 겨우 독일어 초중급인 내가 번역의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다만 나는 한국어로 다소 어색해 보일 지언정 원문에 최소한으로 개입하는 번역이 좋다고 생각하고, 그런 이유에서 문학과지성사 판본을 샀다. 글의 매끄러운 흐름이나 몰입감을 중요시한다면 은행나무 판본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22년 8월 이 모임을 시작한 뒤로 점차 언어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다. 그럴수록 건축 작업에 소흘해지고 있어서 요즘 고민인데, 일단 시작한 흐름을 계속 이어가다 보면 언젠가 자연스럽게 건축과의 연결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년에 C1까지 진도를 나가면 그때는 원서 읽기에도 도전해봐야겠다. 진도를 거의 끝낼 때 쯤 독서모임에서 한강의 『희랍어 시간』을 읽으니, 한국어 원문(!)을 먼저 읽은 후 독일어 번역본(!)을 읽는 것은 좀 수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