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판화를 한 번 해봐야지 고민만 하고 독일어니 개인작업이니 핑계를 대며 미뤄오다가, 독일어 시험이 끝나고 이제 좀 여유가 생겨 고민하던 판화를 배워봤다. 판화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괜히 정식 커리큘럼을 신청했다가 성향이 맞지 않으면 후회할까봐 원데이클래스로 신청했다. 오늘은 오목판화의 두 기법인 에칭etching과 드라이포인트drypoint를 배웠고, 다음주에는 석판화를 배운다. 현장감을 잘 기록하기 위해 사진들은 보정하지 않은 채 올렸다.
멋진 작업실에 구비된 도구들을 보며 판화를 제대로 하려면 작업실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10*10cm 판에 작업할 이미지를 준비한다. 나는 유려한 라인에 적합한 에칭에는 인물 크로키를, 직선에 적합한 드라이포인트에는 평소 찍어둔 건축물 사진을 골랐다.
선생님이 이미지를 반투명 필름에 전사(?)해오신다. 동판에 발라둔 붉은 겹을 백그라운드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백그라운드는 상성이 좋아서 필름에 전사된 이미지가 잘 묻어나온다고 한다. 동판 위에 필름을 놓고 프레스로 압력을 가해 필름 이미지를 동판으로 다시 전사한다.
동판(정확히는 그라운드)에 전사된 이미지를 니들로 긁어 홈을 파낸다.
판을 부식시킨 뒤에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는다.
오래 부식시킬수록 진한 선이 나오므로, 가장 진하게 표현하고 싶은 부분부터 홈을 파낸 후 산(부식액)에 넣어 5분, 2분, 30초 순으로 부식시킨다.
아크릴판 아래에 이미지를 대고 니들, 사포로 원하는 굵기만큼 이미지를 새긴다.
만약 이미지 전체적으로 어두운 톤을 깔아주고 싶다면, 아크릴판 크기만큼의 사포를 준비한다. 톤을 깔고 싶지 않은 부분만 미리 잘라낸다.
이후 아크릴판 위에 사포를 잘 맞추고 프레스로 누르면 사포의 거침이 아크릴판에도 새겨진다.
이제 판에 잉크를 묻히기 위해 빅그라운드리무버를 판에 발라 그라운드를 불리고, 종이로 밀어 판을 깨끗이 만든다.
사용한 잉크는 옵셋잉크. 다양한 판화기법에 무난하게 쓰인다. 판 홈에 잘 들어가야하기 때문에 유화물감보다 찐득하다.
판에 헤라를 이용해 잉킹해준 뒤 남아있는 잉크는 면망사로 잘 닦아낸다. 나는 이때 힘을 약하게 줬더니 결과물이 예상보다 진하게 나왔다. 내 힘을 기준으로는 면망사도 세게 힘을 줘야 제대로 잉크가 닦이는 것 같다.
잉킹한 판이 준비되었으니 찍는 일만 남았다. 판화를 찍을 종이는 프레스에 잘 눌리도록 물에 담가두는데, 너무 축축한 상태로는 찍을 수 없으니 담가둔 종이를 꺼내 갱지 사이에 놓고 눌러서 물기를 적당히 빼준다.
맨종이-판-찍을 종이-갱지 순으로 프레스(정확히는 프레스의 베드 부분)에 올려놓고 판을 찍는다.
완성한 이미지는 종이가 마르도록 마스킹테이프로 벽에 스트레치해 붙인다.
에칭은 꽤 마음에 든다.
드라이포인트는 너무 창피하다. 중앙의 조명, 문 안쪽 사포의 고름 정도, 주변 벽돌들의 형태가 아쉽다. 초반에 공들여 작업한 서양식 처마 부분은 괜찮지만.
직접 해보니 판화는 힘이 많이 들어가는 장르다. 작업하기 전 밥을 든든히 먹어야 한다. 아침에 시간이 없어서 밥을 거르고 갔더니 니들로 판을 새기거나 프레스를 돌리는데 힘이 없어서 힘을 많이 써야 하는 드라이포인트는 뒷심을 발휘하지 못했다.
작업이 다 끝났으면 유성세척액과 에탄올로 판을 닦아내면 된다. 찍어낸 이미지를 보고 판을 더 보완해 다시 찍을 수도 있다.
원데이클래스 내용 외에 개인작업도 들고 가서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 판화는 내가 주로 작업하는 일러스트와도, 타이포그래피와도 접목할 수 있어 무척 매력적인 것 같다. 다만 작업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다음부터는 작업 계획을 미리 잘 세워야할 것 같다.
아쉬웠던 드라이포인트 작업을 하면서 들은 선생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틀린 그림이란 것은 없으며, 그런 제어하기 힘든 우연성이 판화의 매력이라는 것. 독특하게도, 직접 이미지를 그리는 회화와 달리 우연성에 기댈 수 있다는 점, 그 우연성을 위한 공예적 행위가 판화의 매력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