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간과 하인공간
플랫폼엘 《가능한 최선의 세계》
by Haim Jung Nov 19. 2021
전시기간: 19.12.10-20.05.03
관람일: 20.01.21
소규모 미술관의 장점은 대규모 미술관에서 진행하기 힘든 실험적인 전시가 상대적으로 자주 열린다는 것이다. 개관 6년 차가 된 플랫폼엘은 전통적인 미술관과는 다른 형식의 예술활동을 추구하고, 관객들에게 다양한 예술체험을 제공하는 것이 목표이기도 하다. 플랫폼엘의 건물은 중정 형식을 가지고 있어 이 구조를 활용해 더욱 실험적인 전시를 진행한다. 《가능한 최선의 세계》는 그런 목표에 부합하고 있는데, 소설가 정지돈이 만든 세계관을 작품과 문학으로 경험하는 전시이다. 관객은 입구에서 세계관에 대한 안내를 받고, 작품을 관람하면서 작품 옆에 있는 카드를 수집하고, 카드에 적힌 소설을 읽으며 세계관을 이해한다.
전시 관람 방법 안내
전시에서 인상적인 점은 전시장이 아닌 공간을 전시장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건축가 루이스 칸(Louis Isadore Kahn)의 개념을 빌리면, 건물의 보조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하인공간’을 건물의 주된 기능이 이루어지는 ‘주인공간’화했다. 일반적으로 갤러리와 중정은 전시장으로 자주 쓰이지만, 그렇지 않은 기계실, 계단, 옥상 또한 전시장으로 활용했다. 이 세 개의 공간은 세계관 속에서 ‘예외의 공간’이라는 역할을 부여받고 그 성격에 맞는 작품들을 품었다. 세계는 ‘레드프린트’와 ‘블루프린트’라는 두 개의 우주로 구성되어 있고, 두 우주 사이의 균열에 ‘예외의 공간’이 있다. 전시 세계관과 루이스 칸의 개념은 ‘레드프린트, 블루프린트-주인공간’, ‘예외의 공간-하인공간’으로 대응된다. 이 예외의 공간에는 두 우주의 정체성에서 벗어나려는, 또는 그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해 혼란을 겪고 있는 주제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기계실은 물리 법칙이 적용되지 않고 무질서한 우주 ‘레드프린트’의 예외의 공간이다. 이곳에는 〈메셔〉라는 작품이 설치되어 있는데, 두 남성이 영상통화를 하며 서로의 위치를 찾는 영상이다. 모노톤의 영상은 연결이 끊기는 듯 거칠고 레이어가 겹겹이 쌓인 소리와 이미지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모습은 마치 기계가 거칠게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계단과 옥상은 AI 기술로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는 정확한 우주 ‘블루프린트’의 예외의 공간이다. 이곳에는 〈캄브리아기 대폭발〉이 설치되어 있다. 도시 구조물 틈새에 기생하는 생명체가 있다는 가정하에, 이 생명체를 연구한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계단 곳곳에 이 생명체의 모형과 이를 관찰한 드로잉이 있고, 옥상에는 작가가 이 생명체들을 연구한 작업실이 설치되어 있다. 도시의 주된 구조물 중 하나인 계단에 이 생명체가 존재하는 것, 그리고 도시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옥상에 연구실이 설치된 것 모두 공간의 성격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또한 기계실은 건물의 가장 밑인 지하 3층에, 계단과 옥상은 건물의 가장 위층에 있어 위치적으로도 두 세계가 정반대에 있음을 보여준다.
《가능한 최선의 세계》는 작품과 공간 사이의 관계, 그리고 공간과 세계관 사이의 관계가 정확하게 대응되면서 미술관의 물리적 범위를 도시 전체로 확대했다. 이러한 시도는 관객에게 예술체험의 새로운 방법을 제시해줄 뿐 아니라 일상적인 ‘공간’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의미가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