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한글박물관 상설전이 8년 만에 재단장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금 늦게나마 방문했다. 국립경주박물관 공간 디자인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양태오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맡았다고 해서 전시를 본 뒤 관련 인터뷰들을 찾아보았다. 인터뷰를 읽기 전과 후 전시에 대한 생각이 꽤 바뀌어서, 혹시 전시를 볼 계획이 있으시거나 이미 보셨다면 글 하단에 첨부한 양태오 디자이너의 인터뷰를 읽어보시기를 추천한다.
전시는 훈민정음의 첫 문장인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내 이를 딱하게 여겨/스물여덟 자를 만드니/쉽게 익혀/사람마다/날로 씀에/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라는 구절을 일곱 단위로 쪼개어 각 섹션의 제목으로 사용했다. 한글 발명의 육하원칙을 추측할 수 있는 이 문장을 공간 구성에 활용함으로써 전시는 훈민정음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교과서 같은 전시가 되었다.
[전시의 흐름]
먼저 프롤로그에서는 전시의 기반이 되는 훈민정음의 첫 문장을 보여준다. 이 문장은 관객이 천천히 전시장을 걸으며 음미할 수 있도록 한글 자음 그래픽과 함께 바닥을 비추고 있다. 문장을 음미하며 동선을 따라가면, 그다음에는 훈민정음해례본을 본뜬 설치물이 어두운 공간을 비추는 유일한 빛으로서 존재한다. 조선의 암담한 언어 현실 속에서 한글이 한줄기 빛이 되었음을 공간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프롤로그
프롤로그를 지나 "섹션 1.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에서는 한자를 한글의 발음에 맞게 교정해 사용한 문서들이 전시되고, "섹션 2. 내 이를 딱하게 여겨"에서는 백성들을 위했던 세종의 한글 창제 정신을 알 수 있다. "섹션 3.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부터 한글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유물들이 전시되는데, 이곳에 전시된 훈민정음해례본과 언해본은 천지인을 상징하는 거대한 공간에 놓여 있다. 천장과 바닥의 원은 각각 하늘(천)과 땅(지)을, 두 원을 잇는 두 개의 기둥은 사람(인)을 의미한다. 한글의 뿌리인 훈민정음해례본이라는 가장 중요한 자료가 전시된 곳이다 보니 이곳이 전체 공간에서 가장 강조되어 보였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람을 뜻하는 두 기둥이 꼭 마을 입구의 솟대 같은 느낌이 들어서 본격적인 전시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섹션 3.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섹션 4. 쉽게 익혀'에서는 한글을 민간에 전파하기 위해 제작한 종교 및 다양한 분야의 실용서들이 전시된다. 수십 권의 책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배치를 통해 한글 전파를 위해 부단히 노력한 국가의 정성이 드러난다.
섹션 4. 쉽게 익혀
'섹션 5. 사람마다'에서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한글을 사용했던 기록이 전시된다. 왕족부터 평민까지 모든 사람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한글을 쓰고 있는데, 사람마다 다른 글씨체와 종이를 아끼기 위해 빈틈없이 글자를 채운 흔적들, 그리고 안부인사나 빚 독촉 등 개인적인 사연들이 적힌 한글 문서들이 그 시절 한글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어 무척 흥미롭다.
섹션 5. 사람마다
'섹션 6. 날로 씀에'에서는 한글을 공식 언어로 지정한 후 한글을 지키려 노력한 일제강점기의 노력들을, 마지막 '섹션 7.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에서는 한글을 더 사용하기 쉽게 개발하고 전파했던 노력들이 전시되며 한글의 현 모습과 앞으로 더 발전될 모습을 기대하게 만든다.
(왼)섹션 6. 날로 씀에, (오)섹션 7.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공간 디자인에 관한 생각]
이처럼 전시는 한글의 역사를 훈민정음의 첫 문장에 빗대어 시간순으로 펼쳐내고 있다.사실 전시를 볼 당시에는 공간 디자인이 크게 인상적이지 않았다. 한글이 가진 역사에 비해 공간이 굉장히 현대적으로 마감되어서 한글의 위대함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가볍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태오 디자이너의 인터뷰를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세계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한글은 젊은 언어라고 말했다. 같은 언어라도 그것을 날 때부터 사용하고 학교에서 역사를 배우며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한국인과, 이제 막 한국이라는 국가에 관심을 갖게 된 외국인 입장에서는 한글의 이미지가 전혀 다를 것이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영어의 중요성을 귀에 앉도록 듣고 배워왔지만 한글을 그렇게 가르치는 다른 나라는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인터뷰를 읽으며 이런 관점이 박물관에 방문하는 다양한 관객들을 고려한 관점이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필자 본인의 생각을 기본값으로 여기는 태도를 항상 주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적인 공간 컨셉 외에 디테일도 눈여겨 볼만 했다. 벽에 새겨진 섹션의 제목은 일정한 비율의 칸에 나뉘어 있는데, 이 비율이 벽을 마감한 패널의 줄눈과 일치하도록 제작되어 공간이 한층 더 견고하게 느껴졌다. 비록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를 위해 노력한 점이 보여 좋았다. 종이의 따스한 질감과 현대적인 미감으로 유물을 담아낸 젊은 한글의 공간이었다.
전시 제목 레터링. 검은 벽 패널에 딱 맞는 크기로 제작되었다. 사진에서 미묘하게 보이는 벽의 흰 줄눈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유산을 역사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의 시점으로 풀어낸 결과물들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2년 전 이날치의 한국 홍보영상을 시작으로지금은 양태오 디자이너의 과감한 공간이 그렇다. 과거 이집트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무려 3000여 년 동안이나 똑같은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왕권 문화였던 데다가 그 일정한 양식이 현재에 이르러 이집트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큰 자산이 되기에 훌륭하다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반면 전통문화가 상대적으로 덜 계승된 한국 입장에서는, 과거의 것을 그대로 잇는 정신도 필요하지만 지금처럼 창작자들이 자기만의 한국성을 찾아가는 방향 역시 역사를 잇는 중요한방법 중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