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널 판타지 14 : 효월의 종언에 대한 산문
언젠가 작품명을 동시에 헷갈린 적이 있다. 오은 시인의 시집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문학동네, 2013)와, 박해울 소설가의 「희망을 사랑해」(오늘의 SF 1호", arte, 2019)를 섞어서 <우리는 희망을 사랑해>라는 제목으로 멋대로 개조해 버렸었다. 이 문장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고, 한 게임을 완전히 플레이 한 뒤에 멋대로 빌린 문장을 쓰기로 했다. 우리는 희망을 사랑해. 선언적이기도 한 이 문장은 '우리'라는 공동체와 '사랑'이라는 감정의 정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희망'이라는 단어의 정의가 필요하다. MMORPG가 이런 거대한 사명을 완수해 낼 수 있을까?
『효월의 종언Endwalker』(이하, 효월)은 『파이널 판타지 14』(이하, FF14)의 연대기를 마무리하는 다섯 번째 확장팩이다. 게임 전체의 세계를 (내적인 의미로든 외적인 의미로든) 리부트 해버린 첫 번째 확장팩 『신생 에오르제아』가 2013년에 발매되었으니, 9년의 세월을 지나 마침표를 찍었다고 할 수 있다. 전작 『칠흑의 반역자Shadowbringers』가 스토리를 내세운 MMROPG/JRPG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받았으니 이 확장팩에 기대를 쏟아붓는 건 필연적이다. 글로벌 릴리즈 이후, 평단에서 찬사가 쏟아졌고 기대는 확장되었다. 그리고 국내의 '빛의 전사들' 역시 만족했고 게임에 애착을 지녔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게임은 시종일관 자신들이 벌여온 세계와 이야기를 조망하며, 되짚으며 천천히 나아가는 식으로 스토리를 진행한다. 소수점을 늘려가며 스토리를 점진적으로 진행한 '. X 패치'마다 뿌린 떡밥은 전부는 아니어도 거의 해소되었고, 감정적인 골 역시 천천히 파내어간다. 이때 게임은 '희망'을 가지고 나아가는 용사에게 바치는 헌사처럼 서사를 전개한다. 모든 것을 천천히 사려하며, 구할 수 없는 것과 구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윤리적 저울질보다는 감상적이고 감정적인 태도로 게임 내의 캐릭터들, 실존을 대한다. 시간과 공간이 아무리 멀리 있더라 하더라도, 살아 있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우직하게 밀어붙인다.
GameSpot의 리뷰어 Jenny Zheng은 '클라이맥스 지역인 울티마 툴레가 조금 부족한 것 같다', '게임의 서사는 지난 9년 동안의 확장팩을 모두 갈무리해야 하기 때문에 속도가 지연된다'라고 평가했고 나 역시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다. <칠흑의 반역자>가 끝맺은 '제 1 세계'의 묵시적인 이야기에 비해, <효월>의 결말은 다소 단정하고 깔끔하며 동시에 담백하다. 모두가 예측할 수 있는 희망. 내일을 살아가자는 메시지. 정석을 따르기에 예측할 수 있고 감정적인 몰입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다소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참, 나도 미행 퀘스트는 정말 진절머리가 났다.)
여기에 역사적 맥락이 추가되며 효월의 종언은 한국인의 입장으로서 쉽게 좋아할 수 없는 확장팩이 된다. 모두가 거론하는 83레벨 에어리어 <갈레말드>가 그렇다. '새벽'의 멤버들과 '빛의 전사(플레이어가 아닌 캐릭터, '히로시' 혹은 '메테오')는 너무 정이 많아서 정치 범죄, 전쟁 범죄를 일으킨 국가에게마저 온정의 손길을 뻗는다. 제국주의와 침략, 순혈주의를 기반으로 한 차별과 핍박, 제복과 경례, 으로 이루어져 있는 국가 갈레말 제국은 자연스레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연합국들을 연상케 한다. 이러한 '가해자'의 서사를 조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섬세한 플롯과 연출이 반드시 요구된다. <효월>은 다만 '죄 없는 피해국민'과 '고결한 갈레말인'을 분간하기 어렵게 내세우며 감정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서사를 전개한다. 그동안의 확장팩에서 갈레말 제국을 적으로 내세웠으니, 이제는 온정의 시선을 보내 보라는 메시지처럼 들린다. 그러나 정치/역사적인 맥락이 추가된 판타지 서사시에 이러한 설계는 불필요해 보였다. 오히려 '새벽'의 포지션을 애매하게 만들 뿐이며 일관되게 유지해야 할 감정이 갈피를 못 잡는 것처럼 다가왔다. 효월이 '희망'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칠흑>에 비해서 <효월>은 확실히 고전적이다. 게임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패키지 일러스트에서부터 그렇다. 어둠을 등진 암흑기사와 빛을 뒤에 업은 나이트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칠흑>의 패키지 아트에서 볼 수 있는 어둠의 전사에서 우리는 반영웅(Anti-Hero)의 징조를 읽는다. 이 묵직하고 어두운 얼굴은 적대해야 할 아씨엔 에메트셀크의 사정을 이해하지만 동정하지는 않는, 엄정함과 그럼에도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선한 의지의 충돌에서 비롯된다. 통상 우리는 양면적인 주인공의 얼굴에서 이상한 전율을 느낀다. 이렇듯 <칠흑>은 모든 상처를 끌어안고 희생을 기억하며 어둠을 가진 주인공이 얼마나 숭고해질 수 있을지를 다룬 서사시다. 반면에 효월에서 우리는 고전적인 영웅의 상을 읽는다. 방패와 검이라는 도식으로 이는 형상화된다. 누군가를 지키고, 사랑하고, 이해하며, 내일을 살아고자 하는 의지 그 자체인 깃발로서의 영웅이다. 이 얼굴은 <칠흑>의 빛의 전사보다 밝고, 확연하며, 가슴을 밝힌다.
그리고 <효월>의 서사는 이 '상'을 충실히 이행한다. 마지막에 악 그 자체와 혈투한다는 점에서는 신화적이고, 수많은 동료의 의지와 소시민들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을 대변한다는 점에서는 소년만화적인 영웅의 행보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효월>에서의 빛의 전사는 차라리 사람이라기보다는 관념에 가깝다. '빛의 전사'가 이 세계에서 '선'이자 '희망'이듯이.
울티마 툴레의 BGM <Close in the Distance>는 직역하자 '거리를 좁혀나가며'라는 뜻이다. 게임의 후반부 서사는 소통의 불가, 착취, 절망을 삼중으로 공명 시키며 잘 만든 교향곡처럼 웅장하게 어우러진다. 메테이온의 존재에서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약한 부분을 떠올리고, 세상이 이렇게 끔찍할 수 있구나 하며 한탄한다. 전쟁과 혐오가 판치는 세상이기에 이러한 서사는 더욱 힘 있게 다가오며, 게임 내적으로는 영웅의 길고 지난한 서사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단단하다. 그럼에도 빛의 전사는 나아가기를 택하고, '쓰러뜨릴 적'이라고 인식한 메테이온과의 거리를 좁혀 나가며 꽃을 선물한다. 이 거대한 스토리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 절망한 존재에게 손길을 내민다는 점은 상당히 암시적이다. 대부분의 판타지 MMORPG가 '지나가는 사람을 도와주기' 식으로 스토리를 전개하는 것으로 모두가 알고 있고 실제로도 그렇다. <효월>은 이러한 도식적인 구도마저도 서사의 축으로 삼아 거대한 감정들을 흐르게("Flow") 한다.
빛의 전사는 과거의 선한 사람이며 원형의 영웅인 베네스-대지모(Gaia)이자 인간을 사랑하는 신인 하이델린의 지지를 엎고 결국 거대한 악 두 가지-'절망'이라는 관념과, '폭력'이라는 관념(메테이온과 제노스)-를 쓰러뜨리고 만다. 이러한 시적인 스토리는 굉장히 큰 감정의 여파를 준다.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효월>의 세계를 꾸미는 '희망'에는 다양한 맥락이 있고 그 결도 제각 기이다. 신에게 사랑받기 때문에(하이델린), 다른 사람을 저버릴 수 없고 동료들이 있기 때문에(새벽), 누군가에게 부탁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엘피스' 지역과 '제1세계'), 어쨌든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도와가며, 꿋꿋하게, 살아간다. 게임 캐릭터들의 디테일한 행보와 관계는 현실의 우리와 겹쳐지며 이윽고 큰 감동이 된다. 살아갈 수 있다. 절망적인 세상에서도 희망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처음의 명제를 떠올려보자. 우리는 희망을 사랑한다. 게임을 하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즐거움을 얻고, 그것마저도 희망이 된다. 그리고 희망을 가진 사람은 사랑할 수 있다. 나 자신을, 타인을, 그리고 세상을. 자극적인 콘텐츠가 판치는 세상에서 이야기의 힘을 믿는 굵직한 대서사시 하나가 끝이 났다. 후련하면서도 다음 이야기가 기대된다.
2023.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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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서
Gamespot. Jenny Zheng. Final Fantasy XIV Endwalker Review - That, I Can't Deny
https://www.gamespot.com/reviews/final-fantasy-xiv-endwalker-review-that-i-cant-deny/1900-6417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