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팀 원더포션Wonder Potion이 개발하고 네오위즈가 배급한, 2023년에 발매된 인디 게임 [산나비]를 분석한 글입니다. [산나비]의 내러티브에 대해 분석하는 글이며, 게임 플레이에 대해서는 써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 종류의 리뷰 글은 다른 분들의 리뷰를 참고하시는 쪽을 권합니다.
또한 이 글은, [산나비]의 내러티브를 다루기 때문에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작중 중요한 장면을 담은 스크린샷 역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게임을 엔딩까지 플레이하지 않았으면 뒤로가기를 권합니다.
게임의 스크린샷은 전부 캡처했고, 나머지는 출처를 병기하였습니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경고합니다.
이 글은 [산나비]의 핵심 스토리를 다룹니다.
1. 사이버펑크와 게임: 낭만화된 미래
사이버펑크(cyberpunk)는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이 [뉴로맨서Neuromancer]라는 소설을 통해 발명한 뒤로 대중매체에 수없이 변주되어 왔다. 그보다 더 앞선 과거에는 필립 K. 딕과 올더스 헉슬리와 같은 어두운 비전을 보인 SF 소설가들이 활동했다. 이들은 아서 C. 클라크와 같은 낙관주의 SF의 반대 진영에서 디스토피아(dystopia:반(反)유토피아)를 그려왔다. 사이버펑크는 이러한 ‘우울한’ SF의 DNA를 탑재한 채로 미래의 것을 두른, 일종의 건축 양식이자 스토리 공식으로 자리매김해왔다. 데카르트 철학과 실존주의, 포스트-휴머니즘과 자본주의 사회의 착취, 성과 윤리가 혼탁한 무정부 사회, 그리고 그 속의 필름 누아르 주인공들. 이러한 문학/예술 사조는 다른 매체에도 영향을 주었고, [공각기동대攻殻機動隊]와 [매트릭스Matrix] 같은 걸출한 작품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쏟아졌다. 사이버펑크는 세기말의 시대정신과도 같은 장르였다.
사이버펑크의 태동기와 첫 번째 황금기 이후로, 30년의 세월이 지났다.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의 비 내리는 로스앤젤레스는 얼마만큼 변화했을까. 이제 우리는 스크린에서만 네온사인과 마천루를 보지 않는다. 사이버펑크는 이제 비디오 게임으로 자리를 옮겨 플레이어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그리고 즐거움은 사회비판이나 절망적인 비전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사진제공 : CD Projekt Red (cyberpunk.net)
2010년대 이후 대중매체는 사이버펑크의 '오래된 미래'를 낭만화한다. 작품 내에 형성되는 세계관이 우리의 미래가 아니라 또 다른 현실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디스토피아 소설이 겨냥하는 ‘불길한 미래 예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이것이 도착하지 않을 미래라는 걸 확신하는 것에 가깝다. 이러한 조류는, 게임계에서도 두드러졌다. CD Projekt Red가 만든 [사이버펑크 2077Cyberpunk 2077]이라는 대작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사이버펑크 2020Cyberpunk 2020]이라는 TRPG를 원작으로 하는 이 게임에는 초대형 예산이 투입되었고, 그 거대한 규모의 기획은 결코 성공적으로 완성되지 못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윌리엄 깁슨은 사이버펑크 2077의 예고편을 보고 '전형적인 80년대 복고풍 미래 스킨을 GTA에다 씌운 것 같다'라고 말했고, 몇몇 리뷰에서도 이 점은 지적된다. (1)
유저들은 이렇게 ‘낭만화된 사이버펑크 세계’에 열광한다. 게임 장르 자체가 사이버펑크가 아니어도 그런 테마의 공간이 나오는 경우도 있고([라쳇 앤 클랑크: 리프트 어파트Rachet & Clank:Rift Apart]), 사이버펑크라는 세계 내에서 다양한 이야기로 또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는 경우도 있다. ([VA-11 HALL-A: Cyberpunk Bartender Action], [Stray]) 이것은 사이버펑크를 요구하는 대중의 수요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수요에 대해서는 본고에서 다루지 않겠으나, 다만 이러한 흐름 속에서 [산나비(SANNABI)]라는 한국 인디 게임이 출시되었다는 것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좌 : VA-11 HALL-: Cyberpunk Bartender Action, 중 : Stray 우 : 라쳇 앤 클랑크 : 리프트 어파트
2023년에 발매된 플랫포머 액션 게임 [산나비]는 이러한 조류 중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모색한 쪽에 가깝다. [산나비]는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고 적을 물리치는 플랫포머 게임이라는 양식 내에서 영화적(cinematic)이면서 상호작용(interactive)적인 내러티브를 구사하는 목표를 온전히 완수해 낸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내러티브가 다분히 ‘한국적’이라는 점이다.
사이버펑크는 서양에서 발명된 장르이며 그 태생부터 동양을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대상화하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을 내포하고 있었다. [산나비]는 이런 장르인 사이버펑크를 동양인, 그중에서도 한국인의 관점에서 체화(體化)하였다. 우리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와 같은 영화에서 미래도시 위에 띄워진 게이샤 이미지를 익히 보아왔다. [산나비]는 이런 ‘동양적 전형성’에서 탈피하여 매혹적인 ‘조선펑크’, ‘K-사이버펑크'의 비전을 보여준다.
이 글은 두 가지를 전제하고 [산나비]의 세계관과 내러티브를 분석한다. 하나는 [산나비]의 세계관과 내러티브에서는 한국적인 면이 관찰된다는 점. 또 하나는, 게임의 스토리가 경험에 있어서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 이 두 가지를 전제한 뒤, [산나비]에서 '한국형 사이버펑크'가 실현되는 양상과 '게임 서사로서 매혹적인 면'을 살펴볼 예정이다.
2. 우리에게 오지 못한 미래: ‘미래형 조선’
게임은 ‘마고 그룹’이라는 기업이 다스리는 가상의 미래도시, ‘마고특별시’를 배경으로 한다. 플레이어는 모종의 사고로 딸을 잃은 ‘주인공'에 이입하여, 딸이 희생된 음모인 ‘산나비'를 추적한다. 이것이 게임의 기본 줄거리다. 이때 ‘마고특별시'는 ‘주인공'이 직접적으로 누비는 배경이자 ‘플레이어'가 클리어해 나가는 스테이지다. 이야기적 공간으로서 ‘마고특별시'는 ‘주인공’에게 수상쩍은 점이 많은 미래도시이며, 게임적 공간으로서는 ‘플레이어’에게 ‘끝까지 가야 할’ 공간이라는 뜻이다. 이 단락에서는 전자를 살펴보기로 한다.
[산나비]를 특별하게 만드는 지점은 ‘한국’이라는 정체성이다. 이를 설명하려면 ‘미래형 조선'과 ‘사이버펑크 한국’ 양쪽 단어 모두가 필요하다. 이 두 가지 단어가 스테이지를 형상화하는 방식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미래형 조선'은 디자인의 기반이고, ‘사이버펑크 한국'은 세계관의 기틀이다. 두 요소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결과물이 플레이어가 보는 ‘마고특별시'의 모습이다. 플레이어가 모두 경험하듯, ‘미래형 조선'은 여러 가지 도트 애니메이션과 캐릭터 디자인에 녹아 있다.
[산나비]의 주요 캐릭터 디자인은 오래된 것과 미래의 것이 혼합된, 사이버펑크의 디자인적 요소를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디자인의 기조는 ‘미래에도 조선이 있다면?’이라는 가정형 물음이다. 일제강점기의 뼈아픈 역사를 지나 해방을 거친 뒤, 대한민국은 서구 문명에 너무 많은 영향을 받았다. [산나비]는 이를 역행하여, 조선시대에서부터 역사를 다시 되짚는다. 조정과 신분제도, 포졸과 한복이 그대로 계승되었다면? 그러한 ‘오래된 것’이 대한민국의 ‘현재’와 섞여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낸다면?
그렇기에 [산나비]의 디자인은 포졸의 복장이나 한복이 자연스레 녹아든다. 과거와 미래가 융합하며, 토속과 도심의 경계가 흐려진다. 마고특별시의 최상층에 천하대장군이 아무렇지 않게 자리하고, 네온사인 아래의 포졸 복장의 군인이 돌아다니고, 디지털 스크린과 한옥과 화음을 내며 어우러지며, 네온사인에는 일본어 대신 한글과 한자가 자리한다. 이는 플레이어 입장에서 ‘생경한 친숙함’을 느끼게 한다. 분명히 알고 있는 장르의 디자인 코드다.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적인 요소와의 융합은, 이토록 섬세한 도트 그래픽과 애니메이션과의 융합은 새로웠다.
이러한 새로움에는 사이버펑크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자리한다. 우선 [산나비]에는 사이버펑크 장르 창작물에서 보이곤 하는 서구권의 아시안 페티시즘(Asian Fetishism)이 없다. 사이버펑크가 태생부터 고도 성장하는 일본에 대한 공포를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래서 가부키, 게이샤, 일본식 가옥, 벚꽃, 사무라이와 닌자가 아무렇지 않게 등장해도 위화감이 없다. 하지만 일부 창작자들에 의해 이런 ‘일본식 요소’는 타자화를 넘어서 ‘페티시’로 자리 잡는다. 이는 서구권 소비자들의 기호를 맞추기 위한 취향이 된다는 뜻이고, 이러한 ‘취향’에 맞추기 위해서 창작자들은 정해진 공식을 반복한다. 그러니 이야기가 단조로워진다.
제작진은 ‘조선'이라는 개념을 오래전 일제강점기를 통해 서구화되어 없어졌던, 지금은 주류가 아니게 된 동양의 미라고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이는 제작진이 한국인 당사자라는 점에서 ‘주체화’된다. 우리의 문화는 우리가 받은 것이기에,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탄생한 [산나비]의 디자인 코드는 답습되는 클리셰가 아니라 재창조를 이룬다. 의도가 거의 이루어진 듯, [산나비]의 세계는 매혹적이고 새롭다.
3. ‘우리’가 반영된 미래 :
‘사이버펑크 한국’과 가족의 정(情)
※스포일러 주의
‘사이버펑크 한국’이라는 말은 ‘미래형 조선’과 대조적으로, ‘대한민국’을 염두에 두고 사용하였다. [산나비]에서 사이버펑크 디스토피아를 구현하는 방식에서는 ‘대한민국’의 정서가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플롯과 세계관, 양쪽에 해당하는 말이다.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이 조선의 영향이 크기 때문에, 이러한 점은 플롯에서 두드러진다. 특히 ‘부성애’라는 요소가 작용하는 방식은, [바이오쇼크 인피니트]나 [라스트 오브 어스] 등 서양 게임의 부성애와는 다소 달라 보인다.
[산나비]의 플롯은 [블레이드 러너]와 [테이큰]을 섞고 한국식 상업영화를 더한 네온색 칵테일 같다. 액션을 곁들인 아버지의 복수극이라는 점에서는 [테이큰]을 (혹은 [더 라스트 오브 어스]를, 실존주의를 레퍼런스 삼은 하드보일드 누아르 SF라는 점에서는 [블레이드 러너]를, 그리고 통속적인 구도를 통해 최대 다수의 플레이어들의 감정적 부분을 직설적으로 건드리는 점에서는 ‘신파’라는, 한국식 상업영화의 어떤 형식을 연상케 한다. [산나비]는 이러한 SF-액션-드라마의 삼각형 스토리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다채로운 삼중주를 전개해 나간다.
*이 글에서는 ‘액션 게임으로서의 [산나비]’는 다루지 않을 예정이고, ‘SF로서의 [산나비]는 후술 할 것이다. 이 단락에서는 ‘드라마로서의 [산나비]’를 고찰한다.
금마리는 귀엽고 유쾌하다.
[산나비]의 스크립트는 통속적인 방향을 채택하여 스토리를 막힘없이 전개해 나간다. 여기에서 개성이라고 할 만한 것은 해학이다. 후술 하겠으나, [산나비]를 구동하는 스토리의 원리는 묵직하고 우울하기까지 하다. 이 네온으로 가득한, 조선 디스토피아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방법은 적어 보인다. 그렇지만 게임은 그런 상황에서 패러디(parody)와 유머를 활용한다. ‘금마리’ 캐릭터의 익살스러운 대사, 배경과 NPC 디자인의 풍자적인 면이 그렇다. 이러한 풍자 요소가 노골적으로 돌출되어 있지 않고, 게임의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 나타나는 점 역시 장점이다. 거의 모든 대사는 자연스럽게 녹아 있으며, 클리셰라고 할 만한 전형적인 대사도 알맞은 타이밍에 활용된다.
[산나비]에서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한국적인 요소로는 ‘신파’가 있다. 이는 영화에서 시작된 용어로, ‘통속적인 소재와 보편적인 인물, 전형적 구도를 사용하는 감정적 과잉의 드라마’라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적인 요소로 ‘신파’를 꼽는다. 일정한 서사 양식을 이용해 최대 다수의 카타르시스를 노리는 신파 때문에, 관객들이 2010년대의 한국 영화를 외면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 신파가 게임 [산나비]에는 존재한다. [산나비]의 신파는 부녀 관계로 나타난다.
이 게임을 구동하는 결정적인 감정적 요인은 부성애다. 주인공은 딸의 죽음을 추적하기 위해 ‘산나비’, 그리고 그와 맞닿아 있는 마고 그룹과 마고특별시의 진실을 파헤친다. 이 진실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여정 내내 함께하던 동료이자 유사-딸 관계를 형성하던 ‘금마리’ 캐릭터가 사실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딸이라는 것이다.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존재가 바로 근처에 있는 사람이었고, 그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는 소재는 우리에게 아주 친숙하다. 심지어 게임은 이러한 ‘깨달음’의 순간을 결말 부분에 배치함으로써, 감동적인 가족 드라마의 순간을 플레이어에게 선사한다.
그렇다면 [산나비]는 외면당해야 정상이지 않은가? 신파는 전형적 이야기이니 나쁜 이야기지 않은가? 이러한 물음의 답은 의외로 게임의 특성에 존재한다. 게이머들은 신파에 적대감을 가지지 않는데, 그 이유는 게임이 보상을 내놓아야 하는 서사매체이기 때문이다. 이는 동서양 게임을 막론하고 벌어지는 현상이다.
게임이 스토리를 향유하는 서사적 특성인 내러톨로지(naratology)와 플레이를 경험하는 유희적 특성인 루돌로지(ludology)을 둘 다 지니고 있는 매체임을 상기하자. 우리는 게임을 하며 항상 보상을 기대하며, 노골적인 결과(result) 창이 없어도 ‘보상의 원리’는 항상 게임 내부에 존재한다. 이때의 신파는 플레이어들에게 ‘플레이로 얻어내는 보상’으로 다가간다. 즉, 서사가 놀이의 단계로 전이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그래서 감정적 과잉은 게임에서 비판 대상으로 자리잡지 않는 경향이 있다. 등장인물과 플레이어가 어느 정도 일치하기 때문에, 플레이어와 캐릭터 간의 ‘감정 이입도’가 다른 매체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장면
그래서 결말 부분의 이 컷 신은 지난한 여정을 헤쳐 나간 플레이어에게 보상이 된다. 영화였다면 뻔하고 질렸을, ‘금마리’의 감정적인 대사는 이런 맥락을 등에 업고 깊이를 획득한다. 게임의 주요한 특성 중 하나는 플레이어가 캐릭터에 이입(role-play)한다는 점인데, 자신의 마우스 클릭으로 사슬 팔을 조종하는 플레이어가, 여정을 함께해 오고 목적 그 자체였던 딸인 ‘금마리’의 과잉된 감정을 거부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이 지점에서 플레이어는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다. 주인공과 동화된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가장 커다란 선물이 도착한 셈이다.
이 장면이 왜 진솔하고 묵직하게 다가오는 걸까. 바로 옆에 있던 존재의 마음을, 플레이 내내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플레이 시간의 약 70%에 해당하는 긴 부분이다.) ‘금마리’는 앞서 설명한 해학과 웃음을 담당하는 밝은 캐릭터이자, 세계관을 설명하는 안내자이며, 위험한 순간마다 주인공을 돕는 조력자다. 그런데 주인공은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그렇게 많지 않다. 이상하게 주인공과 겹쳐 보이는 부분도 있다. 이는 가장 가까운 존재이면서도 알지 못하는 가족의 특성과 닮아 있다. 평생을 함께 살아오면서도 알지 못하는 존재. 이 순간은 플레이 내내 함께 했던 ‘금마리’와, 주인공의 일생에 중요한 개념이었던 ‘딸’이 합쳐지는 순간이다. 그래서 이토록 감동적이다.
[산나비]는 가족의 정(情)이라는 한국의 전통 서사 요소를 내재하고 있다. 이러한 요소를 '신파'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산나비]의 세계가 한국인의 입장에서 타자화할 수밖에 없는 사이버펑크 세계이면서도, ‘우리가 반영된 미래’의 세계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4. 기계의 진혼곡Requiem : 내부로 수렴하는 비극과 마리골드(Marigold)
5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게임은 마고특별시의 층을 올라가는 구조를 띈다. 이러한 스테이지 구조는 플랫포머 게임의 전형이다. 이러한 형식 안에서, 게임에게 플레이어에게 마고특별시를 ‘끝까지 가야 하는 공간’이라고 제시한다. 마고특별시 최상층에 그가 원하는 진실이 있다고 부추긴다. 그런데 ‘주인공'의 머릿속에는 ‘끝까지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라는 딸의 목소리가 있다. 이 내부의 목소리와 외부의 목표는 게임이 플레이어와 주인공 모두에게 부여하는 딜레마이자, 동시에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진행해야만 하는 강력한 동기로 자리 잡는다. 작중 중요한 조력자로 등장하는 ‘금마리’의 대사를 상기해보자. 그는 ‘끝까지 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며, 이 대사는 주인공의 머릿속에 있는 ‘딸’의 말과 충돌한다. 이러한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의 충돌은, 주인공을 단순한 복수귀 캐릭터에서 모순에 찬 비극의 주인공으로 발전시킨다. 동기로서 작동하는 기계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인다.
마고특별시의 최상층에 들어선 뒤에 주인공은 진실을 알고 만다. 산나비는 사실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딸이 죽은 게 아니라 아내가 죽은 것이며, 그러한 자신의 삶조차 마고 그룹의 ‘프로젝트 산나비’의 일환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결정적으로 주인공은 ‘준장’ 본인이 아니라 그의 인격을 복제한 단순한 ‘공산품 로봇’이라는 것을. ‘내 삶이 사실 주체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나 자신은 인간조차 아니었다’는 반전은 사실 그렇게 새롭지 않다. 그것은 [블레이드 러너]의 암시적인 장면으로부터 시작된, 일종의 답습에 가깝다. 문제는 그러한 설정이 어떠한 화두를 던지고 있냐는 것이다. (이것은 딸이 ‘금마리’라는 반전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사항이다.)
딸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복수심으로 변질되어, 주인공을 끝까지 가게 만든다. 이는 내부의 고뇌가 외부로 향하는 과정이며, 마고 그룹의 프로젝트 산나비가 의도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마고 그룹의 목적이, 그의 복수심 그 자체라는 사실을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한다. 주인공은 완벽하게 ‘디자인된’ 존재이며, 그가 내부에 품고 있던 감정은 모두 누군가가 공산품 찍어 내듯이 만든 것이었다. 이러한 아이러니(irony)를 통해 주인공은 목적을 상실한다. 자신이 바란 목표는 사실 허상의 것이었고, 그의 삶은 주체적인 목적을 갖지 못하고 내던져지기만 한다.
게임은 이런 발견의 과정을 이야기의 절정 부분에 배치하고, 이를 통해 플레이어의 감정을 폭발시켜 버린다. 말 그대로 공중으로 흩어지는 폭발이다. 목적의 상실은 곧 게임을 플레이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발견의 과정에는 두 가지 선택이 기다리고 있다. 하나는 목적을 완수하여 주인공을 인격적으로 살해하는 결말이고, 다른 하나는 목적을 잃어 인간으로서의 죽음을 완성하는 결말이다. 전자의 죽음이 ‘결여’를 나타내고, 후자의 죽음이 ‘완성’을 나타낸다는 점을 기억하자.
자신이 행하고자 했던 복수가 사실은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역설. 이것은 고대 그리스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적인 비극 서사의 논리와 닮아 있다. 이를 통해 [산나비]는 통속적인 복수극에 지나지 않고 비극의 품위를 얻는 데에 성공한다. 4챕터의 마지막 부분에서 플레이어는 선택해야 한다. 계단을 내려가서 ‘산나비’의 정체를 알아내느냐. 계단을 올라가서 ‘금마리’의 상태를 확인할 것이냐.
계단을 내려가 ‘산나비’가 있는 곳에 도달하면 게임은 끝나버리고 만다. 주인공이 마지막 태엽으로서 기능하여 프로젝트 ‘산나비’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배드엔딩’은 원래 목표로 하던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고, ‘끝까지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답을 체화(體化)한 주인공의 마지막 장면을 보여준다. 즉, [산나비]의 ‘배드 엔딩’은 고전적인 ‘파국catastrophe’의 형태다. 이 장면은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의 영화를 연상케 하는, 진한 폭력적 미학의 미장센으로 시작해 ‘지금까지의 극적 사건에 동원된 모든 부분으로부터의 필연적이고도 논리적인 귀결’(2)로 맺는다.
반면에 계단을 올라가 ‘금마리’가 있는 곳에 도달하면, 1개의 보스전(vs. 송 소령)과 그동안의 스테이지를 축약한 5챕터를 클리어하고 추가적인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이는 ‘끝까지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딸’의 목소리를 들어준 선택으로 보는 게 적합하다. 배드 엔딩을 ‘프로젝트 산나비’가 주입한 외압의 복수심, 그리고 금마리의 대사에 귀 기울인, ‘외부에 의한 선택’이라 보고, 이 ‘굿 엔딩’을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내부에 의한 선택’이라고 보자. 그렇다면 [산나비]는 비극으로 향해야만 했던 이야기를,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임으로써 ‘완전한 비극’으로 끝내지 않으려는 서사시가 된다. 이번 세대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희망의 이야기다. 이미 벌어진 비극의 잔재물이자 공산품인 주인공 ‘워커-17287’이 ‘인간’에게 보내는 비가悲歌(Elegy)이자 진혼곡鎭魂曲(Requiem)이다. 이 선택으로 기계에 불과했던 주인공이 ‘또 다른 인간’으로서 완성되며, 그 순간 [산나비]의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가슴을 처절하게 울리는 장면과 함께.
여기서 ‘굿 엔딩’ 임에도 주인공이 결국 죽는다는 결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인공은 결국 한 줌 먼지로 수렴하며, 어느 선택에서든 살아남지 못한다. 이것은 [산나비]가 결국 비극의 서사 구조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모두가 행복할 결말을 줄 생각이 없었다. 다만 ‘인간성의 결여’로 끝나는 비극인지 ‘죽음으로 완성’되는 비극인지가 중요하다. 배드 엔딩은 ‘기계는 역시 기계에 불과하다’는 사고실험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프로젝트 산나비’가 성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굿 엔딩’은 ‘감정을 느끼며, 독자적인 판단을 할 수 있고, 기억에 있어서 원본과 다를 바 없는’ ‘워커-17287’은 곧 ‘준장’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 차이가 [산나비]가 ‘SF-사이버펑크 비극’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인간이 아닌 존재가 가장 인간스러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장르가 바로 SF이고, 한 인간이 죽음으로 수렴하는 과정을 미학적으로 완성한 형식이 비극이기 때문이다.
[산나비]는 가상 세계에 리얼리티를 부여함으로써, 가족이 평생 영원한 동반자가 아니라는 진실을 부여함으로써, 비인간 주인공이 인간스러운 선택을 하는 아이러니를 제시함으로써, 이야기의 설득력을 얻는다. [산나비]의 SF-액션-드라마의 삼중주는 영화적이고 극적인 연출을 기반으로 인상적인 장면을 남긴다. 그것은 고전 SF의 화두이기도 하고, 할리우드 영화의 문법이기도 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가족 서사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게임은 플레이어의 마음에 상흔과 치유의 흔적을 남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정화katharsis라고 불렀던 과정과 유사하지 않은가.
이러한 서사의 진행과 비극적 대단원이게임이라는 매체로 나타나고 있는 점이 주목할만하다. 수많은 게임 스토리는 목표에 달성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플레이어는 목표를 달성하려고 노력하고, 게임은 보상을 제공한다. 그렇기에 절대다수의 게임이 유저에게 유의미한 피드백을 주는 스토리를 채택한다. 이것은 게임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인데, [산나비]는 그것을 고전적인 서사의 방식으로 재해석한다. '과연 끝까지 가는 게 중요한가?'라는 게임 외적인 물음을 내부로 끌어당겨, 내러티브를 한층 더 깊고 풍부하게 만든다.
작중에서 ‘끝까지 가는 게 중요하다’는 질문과 ‘끝까지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질문이 상충하는 것은 주인공/플레이어/스토리가 내재하고 있는 고민과 유사하다. 진실을 알면 파멸하게 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주인공은 계속해서 나아간다. 이는 전통적인 내러톨로지 부분을 충족한다. 동시에 그 고민을 플레이로서 타파하는 루돌로지 역시 충족한다. 플레이어는 계속해서 게임을 한다. 외부로 입력된, 즉 이야기적으로 설정된 전제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산나비]의 설정과 세계는 플레이어가 개입함으로써 달라진다. 스토리가 진전된다.
결국 ‘금마리’는 아버지의 사망이라는 트라우마에서 구원받고, ‘의금부 17호실 특수임무수행대’는 ‘준장’을 떠나보낸다. 주인공이 죽음으로 수렴함으로써 다른 인물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발산을 택할 수 있었다. 그것을 시사하듯, 엔딩 시퀀스(sequence)의 주인공 묘지에는 마리골드가 피어 있다. 기계로 태어나 인간으로 죽은 아버지에게, 마리는 자신의 이름과 퍽 닮은 마리골드를 헌사한다. ‘이별의 슬픔’과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라는 꽃말을 가진 이 꽃을, 게임의 전체 서사를 함축하는 상징물로 보아도 무리가 아닐 듯하다.
5. 맺으며
사이버펑크는 가상세계와 자본주의의 발달을 배경으로 나타난 불길한 계시의 장르였고, 그 미래가 도착한 현재는 ‘낭만적인 오래된 미래’의 장르로 바뀌었다. 특히 비디오게임에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산나비]는 이러한 사이버펑크 장르에서 지역성을 획득하고 고전적인 비극의 논리로 서사를 구성하며, 영화적인 내러티브를 구상하며 신파를 끌고 오는 영리한 선택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이 남는다. 신파는 과연 좋은 서사라고 볼 수 있는가? 게임이 신파에 우호적이라고 해서, 게임에 신파를 적용하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옳을까?
나 역시 결말부의 ‘주인공’과 ‘금마리’의 대화를 보고 감동을 받았고 깊은 여운에 잠겼다. 하지만 그 대사 하나하나가 오히려 몰입을 해치는 순간도 있었고, 게임이 후반부까지 반전을 꽁꽁 숨기는 바람에 혼란스러웠던 때도 있었다. 이 글에서 신파가 좋다, 나쁘다 하는 결론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부분이 흠결이라는 점을 지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 인디게임이 여기까지 왔다는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단 한 번의 뛰어난 창작물이 국가를 대표한다면 오히려 창의성이 억눌리기 때문이다. 완벽한 게임이냐는 말에도 답하지 않을 것이다. [산나비]의 단조로운 반복 플레이 구조나 5챕터의 태생적 부조리함(지금까지 했던 챕터를 답습하여 플레이를 늘어지게 하는 것)은 다른 리뷰어들이 꾸준히 지적했던 점이고, 완벽한 작품은 적어도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다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줄이려고 한다. '[산나비]는 내러티브가 뛰어난 게임이고, 원더포션은 세계관과 서사를 구현하는 데에 있어서 전심전력을 투구했다. 원더포션은 [산나비]를 만들며 서양의 장르 속에서 한국적 세계관을 모색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그러한 바탕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장대했고 감동적이다. 'K'라는 접두사를 붙이지 않아도 이것은 한국의 게임이다. 사슬팔로 마고특별시를 누비는 경험은 귀중했고, 그러한 경험이 특별하다고 느꼈다. [산나비]는 플레이어를 끌어 당기고 이내 감동시키는 영역까지 도달하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