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제르망데프레 교회 뒤에 작은 공원엔 알려지지 않은 피카소의 조각상이 있다. 이 조각상은 프랑스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에게 헌정됐다. 기욤 아폴리네르는 초현실주의란 용어를 처음 만들었던 인물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는 유명한 시인이었다. 특히 단어로 그림을 그리는 실험적인 시로 유명했는데, 38세로 요절했다. 파리 시는 기욤 아폴리네르를 위한 공원을 만들기로 결정 하고, 피카소에게 작품을 부탁했다. 피카소는 아폴리네르에게 소개팅을 해줄 정도로 친한 사이였는데, 왜 갑자기 귀차니즘이 발동한 건지, 아폴리네르의 흉상을 새로 만드는 대신, 미리 제작해 놨던 자신의 연인 도라 마르의 조각상을 전달했다. 조각상을 받은 파리 공무원도 그날따라 일 하기가 싫었던 건지, 작품 확인도 제대로 안 하고 흉상 밑에 기욤 아폴리네르라는 이름을 적었다. 그래서 나처럼 기욤 아폴리네르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도라 마르의 얼굴을 아폴리네르의 얼굴로 믿게 됐다. 내겐 이 공간 자체가 초현실주의와 탈진실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시대를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한 편의 예술작품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