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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불행에 공감하는 방법

레이먼드 카버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by 알스카토

세월호 3주기가 되어서야 잠시 감상적인 슬픔에 빠졌지만, 실은 지난 3년간 무심했다. 인터넷엔 유가족을 비난하는 사람도 많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무심함이나 비난이나 공감 부재에서 비롯된 일이다. 공감 부재, 즉 세월호 유가족의 슬픔을 자신의 감정에서 완전히 분리시킬 수 있었던 건 우리의 인식론적인 오류에서 비롯된다. 즉, 인과론적 인식의 오류다. 우리는 그제, 어제 별 일이 없었기 때문에 오늘, 내일도 별 일이 없을 거라 인과론적 믿음(믿음이다!) 속에 살고 있다. 인과론적 사고의 틀 안에서 세월호 비극은 지나친 논리적 비약이다. (어제, 오늘 괜찮았는데 다음 날 배 침몰이라니...) 때문에 인과론적 사고의 오류는 유가족이 겪은 극도의 고통을 나의 세계에선 발생하지 않을, 철저한 타인의 고통으로 만들어준다.


알레한드로 이냐리투 감독의 <버드맨>은 레이먼드 카버의 시 <최후의 편린>으로 시작한다.

그럼에도 당신은 이 삶에서 얻고자 하는 것을 얻었나요?

그게 무엇이었나요?
내가 지구 상에서 사랑받는 존재라고 느끼는 것.


영화는 대중의 사랑을 잃은 배우 리건 톰슨이 사랑받는 존재가 되기 위한 사투를 보여준다. 시종일관 그를 괴롭히는 질문. 바로 ‘왜’다. 왜 몰락하고 말았는가. 왜 평단은 날 인정하지 않는 건가. 왜 사랑받는 존재가 되지 못했나..... 여성학자 정희진은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끝내는 것이 아니라 끝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떤 원인을 찾고 싶은 심리에서 누군가가 끝냈다고 생각한다’는 것. 모든 현상을 인과론적으로 사고하는데서 고통은 시작된다.


영화를 보고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다시 꺼내 읽었다. <버드맨>의 리건 톰슨이 연기한 에드는 아내에게 배신당하자 아내를 위협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처음 카버의 소설을 읽을 때 에드의 아내가 남편의 광기를 사랑이라고 옹호하는 부분이 납득되지 않았다.

‘그건 사랑이었어요. 물론 대부분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비정상으로 보이겠죠. 하지만 그는 그 때문에 기꺼이 죽으려고 했어요. 실제로도 그 때문에 죽었고.’

<버드맨>의 리건 톰슨을 보니 이해가 될 것 같았다. 리건은 소설 속 에드의 분신이다. 에드와 리건 모두 미친놈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삶의 유일한 이유, ‘사랑받는 존재’가 되고 싶어 몸부림을 쳤을 뿐이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받는 존재가 되고 싶지만, 혹은 다른 무언가를 강렬히 원하지만, 현실은 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왜냐고? 이유가 없다. 카버는 이야기의 전후 맥락을 설명하지 않는다.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설명할 방법도 없고.

‘그녀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모든 이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 속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고, 그녀는 그걸 말로 끄집어내려고 애썼다. 얼마 후, 그녀는 그런 노력을 그만두었다.’(춤 좀 추지 그래)

하지만 카버와 달리 우리의 인과론적 사고는 기어이 전후 맥락을 뒤져 원인을 억지로 찾아내기도 한다.

‘“여자를 잘못 만나면 저렇게 된단다. 잭.” 하지만 나는 아빠가 정말 그렇게 믿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는 단지 그가 누구를 탓해야 할지 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을 뿐이라고 생각한다.’(우리 아버지를 죽인 세 번째 이유)

카버가 말한 정답은 바람피운 아빠가 아들에게 말하는 내용에 있다. 운명.

‘결혼과 관련한 모든 규칙을 지켜오다가도 어느 한순간 그것이 더 이상 문제 되지 않는 때가 있단다. 운명처럼 말야.' (봉지)


<버드맨>의 톰슨은 우연한 사건 덕에 부활한다. 몰락과 상승엔 인과율이 없다. 삶도, 세상도, 관계도. 누구에게나 논리적 비약의 사건은 발생할 수 있다. ‘사랑에 관해 뭔가 아는 것처럼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에 대해선 창피해해야 마땅해’라는 카버의 이야기처럼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어제와 내일의 말이 아닌, 지금, 여기의 행위뿐이다. 단편 '목욕'의 스코티는 여덟 살 생일에 혼수상태에 빠지고, 부모는 비극을 겪게 된다. 카버 소설의 등장인물처럼 내 의지와 무관하게 몰락을 경험할 여지는 무수하다. 때문에 우연의 지뢰밭 위를 걷는 사람이 타인의 비극에 대해 무덤덤한 것은 인과론적 오류다. 대한민국에서 사는 한 누구나 세월호 같은 논리 비약적 사건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과론적 오류에서 벗어나야, 현상이 좀 더 올바르게 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 타인의 비극을 보며 어찌 될지 모를 나의 내일을 걱정하게 만들어준다. 바로 그 지점이 공감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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