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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하게 늙는 방법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 숲>

by 알스카토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 관건은 쿨함이었다. 누가 얼마나 쿨할 수 있는가. 대학교는 고등학교와 달랐다. 특히 관계 맺기가 그랬다. 인간관계. 고등학교에서도 인간관계를 맺는다. 엄밀히 말하면 관계를 맺게 된다. 수동태다. 사육장 같은 교실에서 한정된 인간과의 만남은 능동적인 관계 맺기를 필요치 않는다.


대학은 달랐다. 애써 누군가와 관계를 맺어야 했다. 관계를 맺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종종 상처를 입었는데, 대부분 관계 맺음의 집착에서 비롯됐다. 필요한 건 쿨한 태도였다. 관계 맺기에서의 쿨함.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 숲>의 주인공 와타나베처럼 말이다. 와타나베의 기숙사 선배 나가사와는 더 쿨한데, 그는 사실 좀 병적이다. 소시오패스랄까. 어쨌든 나가사와가 규정하는 쿨함의 정의는 깔끔하다.


와타나베와 나는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관심 있는 인간이야. 오만하고 그렇지 않고의 차이야 있겠지만.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거기에 대한 것 말고는 어디에도 관심이 없어. 그래서 자신과 타인을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어.


그러니까 스무 살이 되기 전, 나는 자신과 타인을 나눠서 생각하는데 어려움을 느꼈다. 그 결과 쿨하지 못했으며, 상처를 자주 입었다. ‘고독한 걸 좋아하는 인간 같은 건 없어. 억지로 친구를 만들지 않는 것뿐이야. 그러다가는 결국 실망할 뿐이니까’란 와타나베의 말. 이게 쿨한 거다.


그러다 연애를 시작했다. 연애는 일종의 독점적 관계 맺기다. 첫 연애는 진정한 의미의 관계 맺기였으며, 바꿔 말하면, 그때 경험한 결별(당함)은 첫 상실의 체험이다. 물론 내 첫 상실은 와타나베의 상실과 비교가 안 된다. 와타나베는 고등학교 시절 유일한 친구였던 가즈키를 잃는다. 가즈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상실의 본질은 불가항력이다. 첫 연애에서 결별이 힘들었던 이유다. 내가 뭘 어쨌다고. 와타나베도 아무 이유 없이 가즈키를 잃었다. 어쩌다. 나가사와 선배와 사귀며 고통받던 하쓰미에게 와타나베가 묻는다. ‘어쩌다 나가사와 선배 같은 사람을 만나 버린 걸까요?’ 하쓰미의 답.

‘그런 건 사람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 아닐까 싶어.’

불가항력적 변수 위에 떠 있는 관계는 필연적으로 불안정하다. 현대인의 고독도 여기서 비롯된다. 전 근대적 사회 속에선 모두 반강제적으로 관계를 맺었다. 강제적인 관계 맺기가 고통의 근원이었을지언정, 외롭진 않았다. 오늘은 관계를 맺으면서도 불가항력적 변수로 인해 불안하고, 관계가 끊어진 이후엔 다시 외로움을 겪어야 한다.


와타나베가 섹스에 집착하는 이유다. 불안정한 관계에 매달려 온기를 찾는 일은 추상적이다. 그 보다는 섹스를 통해 파트너와 교감하며 관계를 맺는 일은 훨씬 더 실제적이다. ‘가끔 온기가 필요할 때가 있거든요’라고 말하던 와타나베의 말. ‘피부로 전해 오는 온기를 느끼지 못하면 때로 견딜 수 없이 외로워요.’


90년대 초, <상실의 시대>로 번역되어 나온 <노르웨이 숲>은 소설 이상의 시대적 아이콘이었다고 한다. 모두가 민주화를 위해 짱돌을 던지던 시절, 성적 욕망은 시위가 끝난 뒤 동시 상영 극장에서 애마 부인을 보며 혼자 해결해야 하던, 연애는 부르주아의 사치로 여겼던 대학가 분위기에서 아마도 <노르웨이 숲>은 혁명적인 개인주의 선언이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2016년, 나이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펼친 <노르웨이 숲>의 감수성은 조금 부담스럽다. 관계의 홍수 속에서 감정의 굳은살은 쌓여가고, 작은 뒤틀림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은 불편해지는 나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외로움이 그립다. 외로움을 느껴 보고픈 사십 대에게 와타나베의 방황은 쿨해도 너무 쿨하다.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할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 하루키의 가르침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갈지 고민하는, 즉,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같은 정보를 원하는 현실적인 40대에겐 좀 공허하지만, 이런 문장을 스무 살이 되기 전 읽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몰려온다. 그때 읽었다면 좀 더 쿨한 대학 생활을 보낼 수 있었을까. 동시에 굳어버린 감수성이 <노르웨이 숲>으로 조금은 촉촉해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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