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로스 <네메시스>
양심은 귀한 것이지만, 그것이 자네가 자네의 책임 영역을 넘어선 것에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시작한다면, 그건 귀한 게 아니게 되네.’ (네메시스, 필립 로스)
예전에 아내가 복직한 직후, 한 번은 무거운 말투로 이제 6살 된 큰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신의 부재가 저 아이 안에 숨어있는 다양한 재능의 발휘를 막으면 어찌하냐는 걱정이었다. 그 얘기를 듣는데 옆에서 책을 장난감처럼 갖고 노는 막내가 눈에 들어왔다. 형, 누나 때와 달리 녀석에겐 책을 제대로 읽어준 적이 없다. 이젠 책을 읽어주려 해도 가만히 못 있는데, 혹시나 나의 무관심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의 작은 행동과 말이, 먼 훗날 아이의 미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그 어떤 묵시록보다 무서운 육아 계시록이 쏟아지는 오늘날의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인간이 행복한 꼴을 도저히 못 봐주는, 그리하여 우리의 불안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필립 로스 할아버지의 책을 읽었다.
필립 로스의 마지막 소설이었다. <네메시스>.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시기, 유대인 마을 위퀘이크에 폴리오 전염병이 퍼진다. 유진 캔터는 학교 놀이터 교사로 근무하며 아이들이 폴리오로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는 걸 지켜봐야만 한다. 폴리오로 아이를 잃은 한 부모가 항변한다. ‘그 애는 뭘 하든 처음부터 제대로 했소. 그리고 늘 행복했고, 늘 농담을 했고. 그런데 그 애가 왜 죽은 거요? 이게 어디가 공정한 거요?’ 캔터는 고민에 빠진다.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놀이터 교사로 아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인가. 그는 책임을 신에게 돌린다. ‘하느님은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비열해. 애들을 죽이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쓰고 있어.’
<네메시스>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불행에 대처하는 방식에 관한 소설이다.(크게 보면 필립 로스의 모든 소설이 그렇다고 할 수 있겠다.) 불행은 상수다. 불행의 근원엔 우연이 숨어있으며, 누구도 불행을 피해갈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사람의 운은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한다. 누구의 인생이든 우연이며, 수태부터 시작하여 우연-예기치 않은 것의 압제-이 전부다. 나는 캔터 선생님이 자신이 하느님이라 부르던 존재를 비난했을 때, 그가 정말로 비난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우연의 법칙에서 단선적 인과를 굳이 찾아내려는 과정에서 불행의 고통은 배가되고, 그렇게 찾은 책임이 엉뚱한 사람-자신을 포함한-을 향하게 될 때, 우리는 불행의 늪에 갇히게 된다. 찾아온 불행은 우연이지만, 불행의 깊이를 키운 건 불행에서 인과를 찾으려는 인간인 셈이다.
그리스인들은 신들로 가득한 세상을 살았다고 한다. 그들은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의 원인을 내부가 아닌 외부, 즉 신에게 돌렸으며, 운명 역시 ‘포르투나’라는 여신으로 인격화해서 받아들였다. 적들이 던진 창 모두가 오디세우스를 빗겨 났을 때, 오디세우스는 아테네 신이 의도를 갖고 자신을 보호한다고 생각했다. 불행이나 잘못에 대한 판단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은 빛난다>에 나오는 내용인데, 이 책의 두 저자는 이를 두고, ‘우리 자신이 우리 실존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이 관점은 호메로스적인 생각, 즉 세계에 대해 우리 자신을 열고 외부로부터의 이끌림을 허용할 때 우리가 최선의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생각과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캔터의 '내 탓이오' 태도는 그리스 시대 땐 없었던, 호메로스 이후의 사고방식이란 말이다.
다시 아이에게로 돌아온다. 삶이 운명에 좌지우지됨을 깨달은 스토아학파는 금욕과 자제심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많은 삶의 우연성 앞에서 선택한 허무주의의 원조 격이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일들이 끊임없이 발생한다는데 경이로움과 감사를 느꼈다. 같은 깨달음의 다른 결론이다. 인생의 많은 책임이 외부에 있다는 걸 알지만, 삶의 매 순간 벌어지는 일에 놀라움과 경탄을 잊지 않는 것. 바꿔 말하면 아이의 미래는 부모가 만드는 것이 아닌 것을 받아들이지만, 육아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그리스인의 정조-감탄하고 예찬하는-로 느끼는 것일 게다. 허무주의는 답이 아니다. 벌어질 수 있는 모든 불행을 예상해보며 전전긍긍하는 건 더더욱 답이 아니다. (필립 로스의 소설을 읽다 보면 그런 전전긍긍을 가끔 하게 됨을 부정하진 못하겠다만.)
약 두 달 동안 사막에 머무를 때다. 아이가 보고 싶어, 돌아가면 육아 휴직을 할까, 장기 휴가를 낼까 호들갑 떨고 있는데 장성한 아이를 둔 스페인 친구가 한 마디 건넨다. ‘키워보니 그런 건 필요 없고, 그냥 있을 때 최선을 다해 즐겁게 놀아주기만 하면 되더라고.’ 부모가 아이를 만든다는 인과론적 믿음이 부모와 아이의 내면을 다 괴롭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용히 하여라. 네 생각에 재갈을 물려라. 묻지 마라. 이것은 올림포스의 신들이 한 일이란다.’ 하루하루 변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떠올려야 하는 것은 ‘부모의 의무’가 아닌, 오디세우스의 이 목소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