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쉽게 삐치는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

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by 알스카토

지난 연휴였던가. 9시 뉴스를 보고 있자니 참으로 곤혹스러웠다. 고장 난 라디오처럼 20년째 같은 뉴스를 반복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뉴스는 마치 사람들이 사실이라고 믿었으면 하는 소식을 내보내기로 결정한 것처럼 시작부터 끝까지, 진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절정은 ‘내리사랑 역귀성길’ 뉴스. 자식을 위해 서울로 올라오는 할머니 이야기다. 허리 굽은 할머니에게 기자가 묻는다. ‘힘들지 않으세요?’ 순간 간절히 바랐다. ‘할머니 제발 힘들다고 말해주세요. 내려오지 않는 자식들이 야속하시잖아요.’ 물론 할머니의 답은 예상대로다. 자식들 볼 생각에 힘든 줄 모르시겠다는.


뉴스 볼 이유가 없었다. 차라리 술자리에서 떠드는 주정뱅이의 헛소리가 뉴스보다 진정성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읽기 시작한 책은 아녔는데, 마침 제목이 <안녕 주정뱅이>이다. 권여선의 단편 소설집. 소설도 소설이지만 작가의 말이 와 닿는다.


술자리는 내 뜻대로 시작되지 않고 제멋대로 흘러가다 결국은 결핍을 남기고 끝난다. 술로 인한 희로애락의 도돌이표는 글을 쓸 때의 그것과 닮았다. ‘술’과 ‘설’은 모음의 배열만 바꿔놓은 꼴이다. 술을 마시기 위해 거짓 ‘설’을 연기하던 나는 어느덧 크게도 아니고 자그마하게 ‘설’을 푸는 小설가가 되었다. (작가의 말)


권여선이 묘사한 술자리는 인생의 동의어다. 내 뜻대로 시작되지 않고 제멋대로 흘러가다 결국 결핍을 남기는. 실제 권여선의 소설엔 딱 술자리만큼의 결핍을 갖고 있는 다양한 인생들이 등장한다. 물론 결핍의 정도 차이는 있지만. 권여선은 그 결핍을 이렇게 묘사한다.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P.176)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에 비견될 문장 아닌가. 결핍은 결국 불행을 낳는다. 이론적으로는 관계 속에서 인간은 각자의 결핍을 어루만지며 불행을 견뎌나가야 하겠지만, 필연적으로 저마다의 결핍은 관계의 장애물로 작동한다. 인간의 자기중심성과 편중성. 인간은 철저하게 자신을 무대의 중심에 놓고 세상을 바라본다. 스스로 무대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두 명이 만난다고 해보자. 내 시야에서 상대는 조연이지만, 그의 시야에서 내가 조연이다. 인식의 괴리에서 갈등이 발생한다. ‘넌 어쩜 날 이해 못하니’란 야속함은 바꿔 말하면 ‘넌 어쩜 내가 주인공이란 사실을 모르니’란 말과 같다.


결핍도 자기중심적이긴 마찬가지다. 내가 지닌 결핍이 보편타당한 정상의 결핍이라고 믿기 때문에, 내 결핍은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받고 위로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파트너가 결핍이 없는 완전무결한 인간이 아닌 이상, 보편적인 정상의 결핍이란 상상 속의 개념일 뿐이다. 이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주변의 모든 사람은 악당이 될 수 있다. 권여선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악당들을 떠올려본다. 위로인지 질책인지 모호한 말을 하며 생색은 있는 대로 내는 언니(봄밤), 괜히 술 먹고 꼬장 부리는 친구(삼인행), 오랜 시절 쌓아둔 서운함을 소심하게 복수한 고등학교 동창(실내화 한 켤레). 그 밖에 세상에 무관심한 예술가(역광)나 성격 더러운 남자 시간 강사()도 작은 역할이지만 소설 속 나름의 악당이다.


물론 악당도 다 사정이 있다. 동생 걱정에 위로를 건넸는데, 동생이 날카롭게 반응하면, 언니 기분이 어떻겠는가. 생색이라도 내야 하지 않겠는가.(봄비) 인생 살면서 힘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가장 친한 친구에게 편하게 꼬장도 못 부리나.(삼인행) 고등학교 시절 당했던 기분 나쁜 일을 풀기 위해 복수인지 아닌지 구분도 안 가는 소심한 행동을 하는 건 또 어떤가.(실내화 한 켤레) 예술가적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라 혹시 의도적으로 세상에 무관심해졌는지 모를 일이며(역광),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는 동료 시간강사들에게 화가 나서 취기에 우발적으로 성격이 더러워진 걸 수도 있다.()


현실에선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악의 제왕 사우론 같은 사람은 거의 없다. (음.. 전혀 없진 않다.) 저마다의 적당한 이기심과 성격적 결함을 지닌 채 관계를 맺을 뿐이다. 작은 이기심, 혹은 사소한 결함이 만나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면, 의도하지 않은 큰 상처와 불행이 탄생한다. 무엇보다 결핍의 자기중심성은 자신의 결핍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원망하게 만든다. 나의 결핍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주변에 야속함을 느끼면서도 타인의 결핍을 이해하지 못하는. 결국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악당이 될 수 있다. 물론 악당이 되는 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 그게.....'라는 소설 속 인물의 중얼거림처럼 누구 때문이 아니다. 인간이 그렇게 생겨 먹었을 뿐이다.


돈키호테는 패배했다. 그리고 그 어떤 위대함도 없었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의 인간 삶이 패배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 삶이라고 부르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소설 기술의 존재 이유가 있다. (<커튼>, 밀란 쿤데라)


밀란 쿤데라가 설명한 소설의 존재 이유다. 결핍이 결핍을 낳고 그 결핍이 모여 불행이 되어, 관계의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게 인간성의 고유한 구조다.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주변에 삐칠 수밖에 없고, 관계 속 패배를 이어갈 수밖에 없음을 <안녕 주정뱅이>는 알려주고 있다. (뉴스에서 뭘 바라겠냐만) 뉴스는 패배를 외면했다. 하지만 술을 마시기 위해 ‘설’을 시작했으며, 이제 작은 ‘설’을 풀고 있는 소설가 권여선은 <안녕 주정뱅이>를 통해 쿤데라가 말한 소설 기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내고 있다.


fa2b1d6a01ae7e83482b9d78f4036edb_D9uqdUCBeLddDWHhgIoNyGl.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육아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