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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삐치지 않는 방법

레프 톨스토이 <이반일리치의 죽음>

by 알스카토

파업 중이다. 뭐 대단한 일은 아니다. 그래도 정신적 스트레스가 있다. 노니까 좋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기간이 보장된 휴가와는 차원이 다르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스트레스의 원인이다. 거기에 무노무임이란 설명을 곁들이다보면, 슬 짜증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야속함이 느껴진다. 자연히 주변 사람에게 예민해진다. 차라리 파업의 명분을 비판해주는 친구가 낫다. 악플보다는 무플이라고. 파업에 대한 주변의 무관심이-아, 너 파업 중이었어?-제일 야속하다.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마저 내 기대만큼 심각하게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앞에서 파업의 명분을 설명하는 내 자신은 뭔가 대단한 엄살을 떠는 사람처럼 초라해졌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반응이다. 취업준비 시절, 광화문 근처에서 공부할 일이 많았는데, 늘 들려오는 노래가 있었다. 처음엔 그 노래의 소음이 괴로웠는데, 노래는 알람시계처럼 규칙적으로 반복됐고, 어느 샌가 그 노래는 공부의 집중력을 도와주는 백색 소음이 되었다. 끝까지 누가 왜 노래를 부르는지, 그 노래의 정체는 무엇인지 알려 하지 않았다. 노래는 파업가였다. ‘흩어지면 죽는다’란 비장한 가사로 시작하는 그 노래를 요즘 매 집회 마무리마다 내가 부르고 있다. 그 때의 배경음을 절박하게 부르는 지금의 모습이라니. 아이러니하다. 세상에 무관심했던 한 남자의 최후랄까. 하지만 원래 인간은 이런 식이다. 지구 반대편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재난보다 내 손가락에 박힌 가시가 훨씬 더 고통스러운 것처럼, 남의 큰 이슈는 내 안의 사소한 문제를 이기지 못한다.


주변 사람에 대한 야속함은 내가 누군가의 전부가 될 수 있다는 망상에서 비롯된다. 이 망상은 부모가 전해준 유산이다. 부모의 무한 사랑에 길들여진 우린 비슷한 형태의 사랑을 타인에게 기대한다. 부모의 사랑을 친구, 동료, 연인의 사랑으로 대체하려한다. 가능한 일이겠는가. 그러니 기대는 깨질 수밖에 없다.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는 한 인간의 심정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특별히 착하거나 나쁘지 않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을법한 보통의 인간이다. 성공을 추구하지만, 부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행사하지 않으며, 이기적이지만, 냉혈한은 아니다. 그런 이반 일리치도 야속함을 느낀다. 왜 주변은 나의 죽음을 이리도 소홀히 다루는 건가. 하지만 과연 누가 죽음의 고통을 완벽하게 이해해줄 수 있겠는가.


물론 일리치에게도 죽음이란 ‘키제베테의 논리학에서 배운 “카이사르는 인간이다. 인간은 죽는다. 고로 카이사르도 죽는다.”라는 유명한 삼단논법의 일례에만 존재했을 뿐,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말’ (P.98)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를 괴롭게 한 건 생소한 죽음의 공포가 아녔다. 오히려 가족들의 거짓 희망이, 거짓된 위로가 그를 힘들게 했다. 자신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해주지 못하는 게 실망스러웠던 셈이다. 서서히 죽어가는 일이 고통스러운 건, 세상이 부모가 해줬던 것처럼 자신을 걱정해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고통이 크면 클수록 야속함도 커진다.


‘사실대로 고백하기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누군가 자신을 아픈 아이 대하듯 그렇게 가엾게 여겨주기를 그 무엇보다 간절히 소원했다. 사람들이 어린애를 어루만지며 살살 달래듯 그렇게 자신을 다정하게 다독이고 자기에게 입을 맞추고, 자기를 위해 울어주기를 바랐다.’ (P.111)


루소는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연민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 때문에 자신의 안락에 대한 강한 욕망을 조절할 줄 아는 태도'라고 정의했다. 자신의 안락에 대한 욕망을 억제하고 조절해야 한다는 거니, 본성에 어긋난다. 한 마디로 연민이란 게 쉽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니란 거다. 설령 초인적 노력으로 높은 수준의 연민을 달성해도, 이는 상대가 느끼는 고통의 근삿값에 도달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타인의 고통과 나의 연민을 같은 수준으로 일치시킬 수 없다. 그러니 상대의 연민을 원하면 원할수록, 우린 끊임없이 부족한 연민 앞에서 상대를 야속해하고 원망하는 악순환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파업 중인 나의 야속함도 마찬가지다.


결국 삐치는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인데, 삐침을 반복하다보면 감정적 소모가 크다. 어떻게 해야 할까.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반 일리치는 어땠을까. 투병 내내 고통스러워하던 이반 일리치는 죽기 직전, 가족을 연민하기 시작한다. 그 연민과 함께 이반 일리치는 투병 내내 자신을 뒤덮고 있던 증오의 고통에서 벗어난다. 알랭드 보통은 ‘어른의 사랑은 아이일 때 어떻게 사랑받았는지를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지 상상해보는 것이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타인의 연민을 구하기 전에 내 연민을 주라는 의미다. 삐침의 무한 순환을 벗어나는 길은 사랑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상대방을 먼저 사랑하는 방법밖에 없다. 적고 보니 이건 죽기 직전의 이반 일리치나 예수님만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은, 약간은 허망한 결론이다. 가끔은 그냥 삐쳐야 할 수도. 파업 끝날 때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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