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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이 아닌) 속죄하는 방법

이언 매큐언 <속죄>

by 알스카토
비행기 납치범들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승객들의 생각과 느낌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면, 이런 일을 계획했더라도 끝까지 진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9.11 테러 직후 <가디언>지에 기고한 이언 매큐언의 칼럼 中


반성이 아니고 속죄다. 속죄는 마음으로 뉘우치는 것을 넘어, 죄를 없애기 위해 구체적 행동을 하는, 적극적인 의미의 반성이다. 속죄는 사실 낯선 단어이며, 우리 주변에서 드물게 일어난다. 타인의 아픔에 쉽게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타인에게 상처를 줄 확률이 낮다. 반대로 주변의 고통에 무감각한 사람은 상처를 주건 말건 상관하지 않는다. 이래저리 속죄할 일이 없다.


우리는 내 옆의 누군가 병들어도 아프지 않고, 괴로워해도 슬퍼하지 않는다. 이 시대는 타인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에 거리낌 없이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는 모두가 병들어도 아프지 못하는, 타인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시대 앞에서 무기력해진 한 개인의 예술적 사투다.


소설 속 속죄의 주인공은 브리오니다. 브리오니는 자신의 잘못된 확신으로 사랑하는 커플을 찢어놓았고, 그 결과 두 남녀의 삶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파국으로 나아가게 된다. 상상 가능한 최악의 파국으로. 브리오니는 실수로 죄를 저지른 게 아니다. 자신의 행동에 문제가 있음을 어렴풋하게 느꼈지만 그녀는 '어리다'는 생물학적 한계를 핑계로 이를 무시했다. 결구 브리오니의 행동은 나비효과를 일으켰고 속죄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너무나 어렸고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 컸기 때문에 갔던 길을 되돌아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독립심이 없었거나 아니면 독립심을 가지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중략)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을 꽉 부여잡고 생각을 다른 데로 돌리지 않은 채 최초의 증언을 반복하면서 자신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어렴풋한 느낌을 피할 수 있었다.’ (P.245)


타인의 생각과 감정 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한계가 얼마나 큰 비극을 불러오는지를 이언 매큐언은 이미 소설 <암스테르담>에서 보여줬다. 고전적 비극의 구조를 차용한 이 소설에서 이언 매큐언은 셰익스피어의 인물을 파멸시켰던 ‘성격적 결함’의 자리에 20세기의 ‘텅 빈 감수성’과 ‘도덕성’을 갖다 놓는다. <속죄>는 <암스테르담>의 문제의식에서 나아가, 문제의 해결 방법을 탐색하는 작품이다.


현대인의 감수성, 즉 공감능력은 점점 퇴화하고 있으며, 공감능력 부재가 가져올 상처와 죄는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타인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현대 사회의 비극을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느끼지 못하는 시대에 예술가(소설가)의 역할은 과연 무엇이 될 것인가. 바로 여기가 <속죄>의 출발점이다.


효율성의 시대에 ‘왜 소설을 읽는가’란 질문의 답은 꽤 궁색하다. 재밌어서라고 답하기엔 이미 소설 말고 재밌는 것이 너무나 많다. 사실 <속죄>의 도입은 부담스러울 만큼 빽빽하다. 한 소녀의 실망을 묘사하기 위해 몇십 페이지를 할애하는 식이다. 왜 그랬을까.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시대에, 이언 매큐언은 빽빽한 감정 묘사를 통해 독자를 타인의 생각과 감정 속으로 집어넣기 위해 분투한다. 소설 읽기란 행위의 근본은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읽어내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일종의 감정 읽기 훈련이다.


‘혼동과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 그리고 오직 소설 속에서만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모든 마음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것이 소설이 지녀야 할 유일한 교훈이었다.’ (P.67)


브리오니는 소설로 속죄한다. 자신의 죄를 공개함과 동시에, 독자가 자신이 겪었던 순간의 상황에 들어와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소설에 바침으로써 속죄의 진정성을 드러내려 했다. 허나 속죄는 이미 저지른 죄를 지우는 행동이란 점에서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이 사실을 브리오니도 잘 안다. 속죄란 개념 속에 애초에 완전한 속죄가 불가능하다는 전제가 포함되었단 의미다.


‘그녀는 정말로 남을 모방한 소위 현대적 글쓰기 양식 뒤에 숨어서 의식의 흐름-그것도 세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의식의 흐름-속에 죄책감을 익사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녀의 소설에 없는 것은 그녀의 삶에도 없었다. 그녀가 삶에서 정면으로 부딪치기 싫어했던 것은 소설에서도 빠져있었다. 진정한 소설이 되기 위해 빠져서는 안 될 것이 바로 그것이었는데도 말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소설의 척추가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척추, 그녀 인생의 척추였다.’ (P.449)


하지만 브리오니의 속죄를 불완전하다고 지적하는 건 지나치게 가혹하다. 요즘 뉴스를 보면 사실 무수한 반성과 속죄가 이뤄지지만, 대부분 척추가 빠진 것들이다. 척추만 빠진 게 아니다. 억울함을 간신히 감춘, 아슬아슬한 반성도 많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효율성의 법칙 아래 필요하다면, 반성이건 속죄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척추 없는 인생들이 모여 척추 없는 사회를 완성했고, 다시 척추 없는 사회는 척추 없는 인생을 찍어내고 있다. 브리오니 식 불완전한 속죄도 멸종한 시대다.


하여 이언 매큐언은 자신의 척추를 담아, 타인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시대를 소설로 극복해보고자 했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속죄는 더 이상 우리 시대에 쓰임새 없는 단어가 돼가는 느낌이다. 이제 우리가 고대 그리스인의 개념들, 예를 들면 아레테나 정조 같은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 철학 개론서의 친절한 설명이 필요하듯, 다음 세대는 ‘속죄’라는 단어의 의미를 대학 강의실의 고전수업을 통해서만 간신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우리에겐 비실용적 자기계발서인 소설이 아직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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