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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나간 조직에서 정신 줄 놓치지 않는 방법

조지프 헬러 <캐치-22>

by 알스카토

지금까지 없었던 혁신적인 기획안을 한 번 뽑아보자고. 부장은 근엄한 표정으로 기획안 심사에 앞서 심사위원들을 북돋았다. 나는 ‘지금까지 없었던 혁신적인 기획안’이 무엇인지 궁금해졌지만, 나머지 심사위원들이 부장님 말씀을 이미 다 이해했단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기에 입을 다물고, 대신 옆에 앉은 후배의 얼굴을 쳐다봤다. 표정에 한 가득 기대가 가득했다. 기획안 심사는 어떤 식으로 진행될까 하는. 반나절쯤 지났을까. 예상대로였다. 난 절망으로 일그러진 후배의 표정을 바라봐야 했다.


혹독한 비판으로 심사는 시작됐다. 이건 도대체 어떤 이야길 하려고 하는지 도통 이해가 안 되네 혹은 이건 문서로만 보면 머리에 그려지지 않아 혹은 말이 안 되는 얘길 하고 있네 등등. 물론 칭찬도 가끔 있었다. 이건 3년 전 그 기획을 완벽하게 업그레이드한 아이디어야 혹은 무슨 이야길 하는지 머리에 한 번에 그려지는 깔끔한 기획안인데 혹은 이거 말 되는 얘긴데 등등. 기획안 칭찬은 모두 내용이 비슷했지만, 비판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다양했다.


기획안 심사의 목표: 지금까지 없던 혁신적인 기획안을 뽑아야 한다. 한계: 지금까지 없던 혁신적인 기획안은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기 어려워 뽑히기 어렵다. 다시 목표: 그럼에도 혁신적인 기획안을 뽑아야 한다. 다시 한계; 지금까지 없던 기획안은 그 혁신성으로 인해 뽑힐 수 없다. 우리는 무한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외통수적 상황에 도달했다. 난관이었다. 과연 부장은 이런 이율배반적인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모든 시선이 리더에게 쏠렸고, 부장은 잠시 고뇌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금 진중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다수결로 하지. 모두가 역시 부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후배는 더 괴로워했다.


나 역시 약간의 위로가 필요했고, 힐링 서적을 펼쳤다. 조지프 헬러의 <캐치-22>. 요사리안 대위의 위로가 필요했다. 2차 대전에 참전한 비행대대 폭격수 요사리안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게 되지 않을까 늘 두렵다. 그는 이미 비행 해제 조건인 50회 출격을 마쳤다. 하지만 비행 해제 기준을 결정하는 캐스카트 대령은 출격 횟수를 계속해서 늘림으로써 그 조건을 무력화시켰다. 요사리안은 비행 출격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늘 캐치-22 조항에 발목 잡힌다. 바로 이게 핵심이다. 캐치-22 조항. 조항의 이해를 위해 실제 적용 사례를 살펴보자.


그 규칙은 긴박한 현실적인 위험의 면전에서 자신의 안전을 걱정하는 행위는 합리적인 심리의 전개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오르는 미쳤고 그래서 비행 근무 해제를 받을 수 있었다. 그가 할 일이라고는 신청하는 절차뿐이었는데, 그가 신청만 하게 된다면 그는 더 이상 미친 상태가 아니어서 다시 출격을 나가야 한다. 출격을 더 나간다면 오르는 미치게 되며, 그러지 않는다면, 정상적인데 만일 정상적이라면 그는 출격을 나가야 한다. 요사리안은 캐치-22의 이 구절이 내포한 절대적 단순성에 깊은 감동을 느껴서 존경스러운 휘파람 소리를 냈다. (1권. P.81)


종류는 다르지만 후배와 요사리안이 부딪힌 벽은 바로 캐치-22 상황이었다. 요사리안을 괴롭힌 에너지는 살고자 하는 열망이었으며, 후배를 갉아먹은 힘 역시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기획안에 대한 갈증이었다. 전형적인 부조리 상황. 하지만 문제는 상황으로 끝나지 않는다. 조직을 지배하는 규범은 캐치-22라는 무형의 조항이지만, 실질적으로 그 부조리를 현실화시키는 건 조직 내 상사 동료 혹은 후배다. 캐치-22엔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분주한 노력으로 캐치-22의 부역자를 자처하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중에서 역시 인상적인 건 상사들이다.


가장 전형적인, 멍청하지만 욕심 많은 유형. 끊임없이 비행 출격 횟수를 늘려 요사리안을 괴롭히는 캐스카트 대령이다. ‘그는 자신에 몰두하고, 그가 놓쳤던 모든 기회들에 대해 항상 못마땅해서 스스로 분노하고 그가 범한 모든 실수에 대해 한탄하며 자신을 힐책하는, 용감하고 빈틈없는 외교관이나 마찬가지였다.’ (1권, P.347)

장군이 되는 게 유일한 목표이며, 부하를 희생시켜서라도 언론에 노출되고 싶어 하는, 성실한 군인이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믿지만, 실상은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헛똑똑이도 있다. ‘페켐 장군은 자기가 탐미적인 지성인이라고 자처했다. 사람들이 그와 의견을 달리하면, 그는 그들더러 '객관적'이 되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2권, P.188) 가장 피해를 덜 끼치는 유형이 순수하게 무능한 상사다. 카르길 대령이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신세를 지지 않고 실패를 거두면서 자수성가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1권, P.47)


반전 소설을 표방하는 <캐치-22>는 ‘캐치-22적 상황’이란 관용구를 만들어냈을 만큼 시대에 큰 족적을 남겼다. 소설 속 군대의 모습은 오늘날의 어떤 조직으로도 치환이 가능한데, <캐치-22>가 갖는 위로의 힘도 바로 여기서 나온다. 하지만 한낱 조직원의 시각에서만 <캐치-22>를 읽는 건 <캐치-22>의 가능성을 너무 축소시키는 짓이다. 소설엔 자본주의의 그림자를 형상화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게 취사 장교 마일로 중위다. 그는 군대 물품을 통해 엄청난 무역 활로를 개척한 뒤, 숨어서 부대를 지휘하는 지하의 권력이다. 전쟁광 장교들과는 결이 다른 캐치-22를 선보인다. ‘마일로는 탄압을 싫어했고 선택의 자유를 부르짖는 수호자였으므로 물론 선택권은 있었는데 그들에게 주어진 다른 선택권이란 굶어 죽는 길이었다.’ (2권, P.280)


도처에 널린 게 캐치-22 상황이다. 우리는 캐치-22에 완전히 포위됐다. 여기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3가지다. 캐스카트 대령의 길. 캐스카트 대령과 한 편이 되어 그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처럼 맹목적으로 좇는 소설 속 대부분의 인물이 여기에 속한다. 어찌 보면 가장 속 편할 수 있는 길인데, 그래도 <캐치-22>를 읽는 수준의 독자가 선택할 길은 아니다. 두 번째 길이 주인공 요사리안의 길이다. 저항의 길이랄까. 요사리안은 한순간도 순응하지 않는다.


‘요사리안은 아이들이 공포나 고통의 암시를 전혀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토록 야만적인 희생을 견딘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는 그들이 그토록 묵묵히 순종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그 관습은 틀림없이 사라졌을 테니.’ (2권, P.347)


훌륭하지만 현대의 소시민에게 부담스러운 길이다. 그리하여 남게 되는 게 댄비 소령의 길이다. 얼핏 보면 댄비 소령은 캐스카트 대령의 충실한 부하다. 하지만 내면의 본능적인 거부감을 무시하진 않는다. 때론 상사에 대한 불만이 표정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요사리안이 따졌다. “그러니까 당신이 하는 일이라고는 그들을 돕는 것뿐이죠.”
“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지.” 댄비 소령이 솔직하게 인정했다. “난 전체적인 결과에만 정신을 집중시키고, 그들이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려. 난 그들이 아무 의미가 없는 존재인 척하지.” (2권, P.420)


미미해 보이지만, 조직의 부조리가 심하면 심할수록 정신 줄을 완전히 놓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성취다. 댄비 소령의 길을 가기 위해선 끊임없이 요사리안의 길을 동경해야 한다. 가진 못하더라도. 손뼉 치고 존중해야 한다. 실제 소설은 부대를 무단으로 떠나는 요사리안을 응원하는 댄비 소령의 모습으로 끝난다.


기획안 심사 때, 괴로워하는 후배와 달리 난 부장의 얼굴을 꽤 무덤덤하게 쳐다봤다. 아마 난 댄비 소령의 길과 캐스카트 대령의 길 중간 어디쯤에 있는 거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댄비 소령의 길에서도 멀어질 수 있으니, 정신 줄 잡는데 도움을 주는 조지프 헬러의 <캐치-22> 백신이 주기적으로 필요하다.

“진담이야 요사리안. 자넨 날마다 모든 순간에 항상 몸조심하고 지내야 해. 그들이 자네를 잡으려고 무슨 짓이건 다 할 테니까 말이야.”
“난 항상 몸조심해야죠”
“자넨 뛰어야 해”
“뛰겠어요”
“뛰어!” 댄비 소령이 소리쳤다. (2권, P.436)


시종일관 차분하게 음울하던 소설이 처음으로 흥분한 순간은 맨 마지막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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