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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낼 곳이 없을 때 화내는 방법

필립 로스 <울분>

by 알스카토

열정 페이라는 말이 있다. 열정이 있으니 페이는 적게 줘도 된다는 식의 생각을 꼬집은 조어다. 청년 노동착취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열정 페이라는 신조어 덕분에 최근 몇 년간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한 때 관련 내용을 취재하면서 여러 청춘을 만났다. 그들 대부분은 예상과 달리 열정 페이에 분노하고 있었다. 부당함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열정 페이가 나의 문제가 될 때, 상황은 조금 달라졌다. 사회의 열정 페이는 옳지 않지만, 나의 열정 페이는 기회만 얻을 수 있다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열정 페이를 제의받았을 때, 지금 당장 이를 거부할 현실적 이유를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게 가장 슬프다’는 한 구직자의 말에 그들의 현실이 담겨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한 마지노선, 즉 최저임금 어쩌고는 그들에게 너무 먼 이야기다.


(참으로 묘한 역설이다. 보통 사람은 나의 문제가 될 때 분노한다. 반대로 사회의 문제에 머무를 땐 무관심하다. 그런데 열정 페이에선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바로 여기에 노동력 착취의 특수한 성격, 즉 김훈이 말했던 밥벌이의 비루함이 숨어있는 게 아닐까.)


필립 로스의 <울분>은 1950년, 그러니까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시기, 한 미국인 청춘이 느꼈던 울분에 관한 소설이다. ‘인생이란 그런 거야. 발을 아주 조금만 잘못 디뎌도 영원한 비극의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거!’ (P.23)라며 자신의 일상을 옥죄는 아버지의 걱정, 자살을 시도했던 여자 친구와 헤어지라는 어머니의 강요, 언제 전쟁터에 끌려갈지 모른다는 징집의 공포, 여기에 오하이오에 위치한 와인스버그 기숙사 대학교의 숨 막히는 도덕적 규율까지, 그야말로 주변의 모든 것이 마커스를 옥죈다. 자신의 삶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려는 주변의 힘 앞에서 마커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버트란드 러셀의 이성과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뿐이다.


마커스의 학교 동료, 그러니까 소설 속 미성숙한 청춘들은 자신의 자유를 질식시키려는 세상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채, 결국 엉뚱한 사고를 친다. 여학생 기숙사를 점거하고, 속옷을 훔치며 집단 폭동을 일으킨 것. 당시 그들이 외친 집단 구호는 “팬티! 팬티! 팬티!”였다.

‘이따금씩 저음의 남성적인 목소리 하나가 튀어나와 지배적인 도덕적 규율 체계에 순응하지 못하겠다는 아이들을 대변하여 그들의 진심을 거칠고 크게 요약했다. “우리는 여자를 원한다” 그러나 군중 가운데 다수는 팬티로 기꺼이 만족했다.’ (P.215)

그들은 자신을 옥죄는 규율에 어떻게 저항하고, 무엇을 위해 자유를 되찾아야 하는지 몰랐다. 그저 마음대로 행동함으로써 잠시나마 자유의 기분을 느껴보고자 했다.


두 번이나 주지사로 선출됐으며, 파업을 여러 차례 분쇄한 정치인 학장 렌츠는 방향성도 목표도 없는 청춘의 에너지를 너무나 쉽게 진압한다. ‘인간의 행동은 규제할 수 있고, 규제될 것이다’라고 믿는 렌츠는 마치 소란을 피운 죄수를 독방에 수감하듯, 청춘의 자유를 더욱 제한한다.

‘렌츠 학장은 “아무 생각 없이 재미만 추구한다”는 말이 마치 “계획 살인을 한다”는 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경멸을 담아 내뱉었다. “반역적인 오만”이라는 말을 할 때는 강한 혐오감을 내뿜어 마치 오하이오 주 와인스버그만이 아니라 위대한 공화국 전체를 훼손하기로 결의한 위협적인 존재의 이름을 발음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P.232)

결국 청춘은 어리고, 다루기 쉬우며, 너무나 약한 존재였던 것이다.


195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마커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청춘은 늘 기성세대의 호구였으며,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젊음은 돈 주고 살 수 없어도, 젊은이는 헐값에 살 수 있다고 보는 모양이다’라며 유병재는 조롱했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래 왔다. 그러니까 아이에서 어른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단계를 세상은 인정하지 않았고, 과도기에 놓여있는 청춘은 스스로의 방향성을 잡지 못한 채 갈팡질팡했다. 그 과정에서 1950년대 미국은 무시무시한 도덕적 규율로 과도기의 혼란을 억눌렀으며, 2010년대 한국은 열정 페이로 과도기적 노동을 싸게 구입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아니라 청춘이니까 아픔인 셈이다.


다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소설의 제목 <울분>. 마커스는 자신의 삶을 과도하게 간섭하던 학생과장에게 러셀의 자유 이론을 설파하며, 구토로 자신의 울분을 대신한다. 그러니까 50년대 미국의 대학생에겐 자신의 자유를 길들이려는, 너희는 가치 없다고 세뇌하던 렌츠 학장 같은 외부의 적이 분명했으며, 그들은 그 힘에 대해 속으로 건, 혹은 여학생 기숙사를 점거하는 방식이건 울분을 표출할 수 있었다. 동시에 삶을 위협하는 존재가 분명했기에 순응도 쉬웠으며, 더 나아가 그 대가도 확실히 달콤했다. 마커스도 와인스버그의 채플 교육에 순응했다면 한국전에 징집될 일도 없었고, 변호사가 되어 아버지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처럼.


지금의 한국은 여기서 차이가 난다. 내 삶은 뭔가 팍팍해지고 있는데, 악당이 보이지 않는다. 최저 임금도 안 주는 사장님? 사장님이 일하라고 강제한 적 없다. ‘월급은 없는데 한 번 일해 볼래’라는 말에 마치 주문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인 건 자기 자신이다. 때문에 악당은 돈 안 주는 사장님이 아니라, 사장님의 주문 안으로 청춘을 밀어 넣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무급 페이라도 받기 위해 애쓰도록 만드는 손이 진정한 악당인데, 눈에 보이지 않으니 미칠 노릇이다. 마커스는 학생과장에 러셀을 이야기하며 응수했지만, 순응이 경쟁력이 된 오늘엔 러셀을 얘기할 대상도, 러셀을 이야기할 필요도 없어졌다.


하여 화는 나는데 화낼 대상이 없어졌기에, 청춘은 냉소를 보낸다. 냉소는 지금의 시대를 버티게 해주는 청춘의 마지막 힘이자, 가장 밑바닥에 남은 감정의 찌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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