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 안의 괴물을 깨우지 않는 방법

아룬다티 로이 <작은 것들의 신>

by 알스카토

아이들은 기가 막히게 작은 것을 찾아낸다. 길을 걷다가. 바닥에 죽어있는 벌레의 시체랄지, 비비탄 총알, 나아가선 조그만 껌 자국까지. 집에서도. 옷에 붙어있는 오래된 밥풀을 뜯어내고, 엄마 얼굴의 잡티를 긁어대며, 식탁 위에 말라붙은 김치 국물을 응시한다. 마치 이 거대한 세상에 가려진, 작은 것들에 대한 본성적 충동이 잠재돼있는 것처럼. 단순히 좋은 시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세상의 모든 것에 경탄할 준비가 되어있는 마음가짐 때문일 것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큰 것이 주는 자극은 수용 불가능한 수준일 테니, 자연스레 작은 것들이 시신경을 타고 아이의 뇌를 자극한다.


한 때 나에게도 작은 것을 향한 충동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큰 것들의 신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큰 것에 사로잡히면 작은 것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큰 것에 대한 충동이 이 세상의 모든 작은 것들을 시야에서 몰아내고, 대신 주류에 대한 집착, 주류에 들어야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는 감정을 불러온다. 큰 것에 대한 열망은 곧 큰 것 사이에서 희생되는 작은 것들의 아픔을 망각하게 만든다. 때로는 큰 것의 대세를 가로막는 작은 것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기도 한다. 큰 것을 향한 열망엔 폭력적인 작은 괴물이 숨어있다.


인도의 여성 작가 아룬다티 로이는 그 작은 괴물이 얼마나 끔찍해질 수 있는지를, 그리하여 세상의 끔찍한 괴물들과 큰 것을 열망하는 나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는지를 선연한 문체로 그려냈다. <작은 것들의 신>. 소설은 작은 존재들의 사랑 이야기다. 아이가 있는 이혼녀 암무와 파라반 출신인 불가촉천민 벨루타. 20세기 중반, 인도의 여자들은 부지런하게 맞았다. ‘매일 밤 그는 놋쇠 꽃병으로 그녀를 때렸다. 구타는 새삼스럽지 않았다. 새삼스러운 일은 더 빈번해졌다는 것뿐이었다.’ (P.73) 일과처럼 맞는 여자들 밑에 불가촉천민이 있다. ‘“이 여자조차 파라반이나 그런 자들을 집안에 들이지 않아요. 절대로요. 저로서도 이 사람을 설득할 수 없어요.”’(P.383) 그리고 두 명의 작은 것들은 역사의 법칙을 어기고 사랑을 했다.


법칙. ‘왜’라는 아이들의 질문이 끊이지 않으면 난 ‘그건 법칙이야’라고 말한다. 다시 질문. 왜. 그때 단호하게 말한다. ‘법칙은 원래 그런 거야. 왜가 없어. 그래서 법칙이야.’ 그 뒤로 ‘그건 법칙이야’는 말은 더 이상의 질문을 받지 않겠다는 아빠의 암묵적인 신호가 됐고, 아이들은 법칙 앞에서 왜를 멈췄다. 법칙은 원래 그런 거고, 원래 그래서 법칙이다. 법칙에 내재한 절대성은 사람을 압도한다. 법칙을 집행하는 사람이나 지키는 사람 모두 절대성에 수긍한다. 하지만 <작은 것들의 신>의 암무와 벨루타는 법칙이 아닌 본성을 따랐다.


모두 법칙을 어겼다. 누구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정해놓은 법칙을. 그리고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지를 정해놓은. 할머니를 할머니로. 삼촌을 삼촌으로, 어머니를 어머니로, 사촌을 사촌으로. 잼을 잼으로, 젤리를 젤리로 만드는 그 법칙을. (P.50)


법칙을 어긴 대가는 가혹했다. 암무는 감금당했고, 불가촉천민 벨루타는 경찰들에게 맞아 죽는다. 벨루타는 두개골이 부러지고, 이빨이 빠지고,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찌르고, 창자가 파열되고, 방광과 항문이 조절 기능을 잃는다. 무심하게 그를 구타한 경찰들, 그들은 괴물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벨루타의 마지막 도움을 ‘당은 노동자의 경거망동한 사생활을 도와주기 위해 결성된 것이 아니’(P.393)라며 거절했던 공산당 간부 필라이 동지는 괴물인가. 아니다. 거짓 계략으로 벨루타를 죽음으로 몰고 간 베이비 코참마는. 역시 괴물이 아니다. 오직 큰 것들을 위한 사상과 종교가 존재한다. 경찰은, 필라이 동지는, 베이비 코참마는 큰 것들의 신에 충실히 복종했다. 벨루타의 죽음을 눈앞에서 바라봐야 암무의 어린 두 아이 라헬과 에스타도 이제 법칙을 깨달았다.


또래 다른 아이들이 다른 것들을 배울 때, 에스타와 라헬은 역사가 어떻게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어기는 이들에게서 벌금을 거둬들이는지 배웠다. 그것의 소름 끼치는 울림을 들었다. 그것의 냄새를 맡았고 결코 잊을 수 없게 되었다.
역사의 냄새.
바람결에 실려 오는 오래된 장미향 같은. (P.82)


큰 것들에 안도하며 살면서 꽤 무뎌졌다고 생각했지만 벨루타의 무기력한 죽음이 불러온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한동안 허우적거렸다. 엄마를 구하기 위해 벨루타가 자신들을 유괴했다고 거짓말을 하던 순간 (바로 에스타를 움직인 게 베이비 코참마의 어두운 계략이었다), 에스타의 마음속에 침묵의 씨앗이 뿌려지던 순간, 에스타의 유년 시절은 끝났다. 피로 충혈된 눈으로 벨루타는 에스타를 바라봤다. 따스한 시선이었을 게다. 그 시선을 바라보며 에스타는 말해야 했다. ‘네 저 사람이 맞아요’ 벨루타는 왜 그리 끔찍하게 불행해야 했던가. 책을 덮고 이 시대의 작은 것들을 떠올렸다. 떠오르지 않는다. 작은 것들은 모두 투명인간인가.


더 이상 뉴스는 작은 것들의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다. 그들의 비극은 뉴스가 아니다. 설령 뉴스에 나오더라도, 그건 남의 이야기다. TV에 중독된 베이비 코참마처럼 그들의 비극을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다. 어렵사리 작은 것들을 떠올려본다. 학대당하는 보이지 않는 아이들, 버려진 고아, 미혼모와 성 소수자, 해고 노동자 혹은 일하다 병을 얻은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추위와 더위를 몸으로 견뎌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 세월호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 자식에게 버림받은 노인, 장애인, 노숙자, 빚에 허덕이는 청춘 등등. 작은 것들은 21세기에도 여전히 많지만 나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기이하게도 마거릿 코참마는 벨루타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이 없었다. 어떻게 생겼었는지조차도.
어쩌면 그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는지도.
상실의 신
작은 것들의 신....(중략)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그 일을 기억하기를 바라는 것은 불합리하다. (P.364-36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읽고 나면 화자인 험버트의 심리 묘사가 어찌나 탁월한지, 자기도 모르게 먼 세상의 변태로만 생각하던 소아성애자의 감정에 공감하게 된다. 내 안에 숨어있는 괴물의 흔적을 발견하게 해주는 것인데, <작은 것들의 신>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필라이 동지이거나 혹은 토머스 매슈 경위다. ‘호기심이 없는 남자들. 의문도 없는 남자들.’ 작은 것들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않는 나는 작은 것들을 향한 세상의 폭력에 둔감하다.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을 읽으면 바로 그게 괴물의 탄생 순간임을 알게 된다. 섬뜩한 체험이다. 괴물은 멀리 있지 않다.


작은 것들의 미세한 감정을 절묘하게 포착한 작가답게, 아룬다티 로이는 아이들의 심리도 마치 아이들의 생각을 TV로 본 것처럼 표현한다. 거기서 단서를 찾는다. 내 옆의 가장 작은 존재와 대화하기. ‘그게 법칙이야’란 말로 아이의 질문을 끊지 않는 것. 큰 것을 향한 어른의 잔소리 대신, 작을 것을 향한 아이들의 성향을 배우는 일, 아이들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려는 노력. 벨루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착하게 살지 못하더라도, 괴물이 되어선 안 된다.


아이들이 꾸며낸 공상에 직관적으로 대응해 어른의 무신경함으로 그것이 훼손되지 않게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다. 혹은 애정으로.
이야기를 산산조각내기란 얼마나 쉬운가. 일련의 생각을 끊는 일도. 도자기 조각처럼 조심스럽게 지니던 꿈의 단편을 부수는 일도.
벨루타가 그랬듯 그냥 있는 그대로, 아이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P.266)


CjYC-7lVEAAY3dD.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화낼 곳이 없을 때 화내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