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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행정인이 되는 방법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by 알스카토

둘째 출생신고를 할 때다. 출생증명서를 챙기는데, 아내가 한 마디 툭 던진다. '그거 다시 뽑아야 할 것 같아. 주소에 오타가 있더라고.' 확인해보니 아주 사소한 오타가 하나 있었다. '뭐 이 정도 가지고. 됐어.' '아냐. 병원 인감도 찍혀있는 문서잖아. 전화해보고 가.' 전화를 하면서도 납득이 안 갔다. 고작 한 글자 틀렸을 뿐인데. 통화 직전까지도 '동사무소 직원이 날 얼마나 소심한 인간으로 생각할까' 걱정을 했다. 하지만 동사무소 직원은 '네 안 되세요. 증명서 다시 떼어 오셔야 해요.'라는 말로 내 쓸데없는 걱정을 위로했다. 아내가 곧 덧붙였다. ‘행정의 핵심은 문서라고. 개인적으로 알고 이해하는 건 행정에서 아무 상관이 없어.’


영혼 없는 공무원. 이 비유는 마치 내 마음은 호수요, 별빛 같은 눈망울처럼 모두가 기계적으로 떠올리는 관용적 표현이 됐다. 따지고 보면 밥벌이하면서 영혼을 빼놓는 게 공무원만은 아니니, 공무원 입장에선 억울할 표현이다. 아마도 오타 있는 증명서 때문에 동사무소에 헛걸음을 해야 했던 사람들의 불만이 증폭되어, 공무원에게 보다 가혹한 잣대가 적용된 게 아닐까 싶다. 사실 아내의 지적에서 알 수 있듯, 관료제의 핵심인 공문, 즉 문서만 봐도 지극히 정당한 존재 이유를 갖고 있다. 문서는 개개인의 소통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조직이라는 가상의 실재와 조직원이 소통하는 핵심 도구가 바로 공문이다.


그럼에도 늘 공무원은 조롱하고 풍자하기 좋은 대상이었으며,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역시 좋은 소재를 놓치지 않고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를 남겼다. 소설의 주인공은 페루군의 행정장교, 판탈레온 대위다. 페루군은 계속되는 군인들의 민간인 강간 문제로 골머리를 썩는다. 이에 군 당국은 군인들을 상대하는 합법적 매춘을 계획한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행정이 군 조직의 알파요 오메가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군인 상대 매춘 업무라는 쉽지 않은 미션을 수행하는데, 얼마나 고차원적 행정 능력이 요구됐겠는가. 그리하여 미션은 탁월한 행정 업무의 소유자, 판탈레온 대위에게 떨어진다.


행정의 핵심은 절차다. 다시 출생 신고서를 뽑아서 찾아간 동사무소. 출생 신고에 필요한 정보를 입력하는 데 '등록기준지'란 낯선 항목이 눈에 들어왔다. 호적 제도가 폐지되면서 본적이 등록기준지로 대체됐다는 동사무소 직원의 심드렁한 설명이 이어진다. 나는 그를 좀 더 괴롭히기로 결심하고 등록기준지의 존재 이유를 물었다. '크게 중요한 건 아닌데, 만약에 이름을 개명하거나 뭐 그런 거 할 때 관할 법원을 정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때 등록기준지를 기준으로 해당 법원을 정하게 돼요.' 등록기준지는 일종의 업무분장을 위한 개인정보였다. 불분명한 업무 분장으로 행정의 공백이 발생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절차. 다시 아내가 덧붙였다. '모든 행정 절차엔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게 없어. 다 저마다의 이유가 있는 거지.'


모든 절차는 행정을 완성해 온 축적의 시간이다. 그 안엔 모든 행정인의 경험과 지혜가 녹아있다. 때문에 공무원은 절차에 대한 원칙적인 복종에서 업무를 출발해야 한다. 모두가 각각의 절차에 의문을 표시하기 시작하면 행정은 흔들린다. 절차에 대한 원칙적인 태도와 ‘영혼 없는 공무원’은 무관하다. 사실 뉴스에서 보는 대부분의 공무원 비리는 영혼(욕심)이 과도하게 많은 경우에 발생한다.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의 판탈레온 대위 역시 빈틈없는 원칙주의자다. 규정을 목숨처럼 중시한다. 생활도 규칙적이다. 그는 ‘절대로 술을 입에 대지 않는 사람’이며, ‘치질을 앓은 이후부터는 저온 살균우유만 마셨’(P.81)던, 사람이다.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의 뼈대는 행정이며, 실제로 소설엔 공문을 차용한 형식이 꽤 많이 나온다. ‘행정장교들은 항상 숫자에 미쳐서 모든 걸 처리하려고 하지요’란 소설 속 표현처럼 판탈레온 대위도, 특별봉사대의 적정 인력 수를 과학적으로 산출한다. ‘하사와 중사, 그리고 일반 사병들의 '남성성의 완전한 충족'을 이루려면 매주 5만 3200회라는 수치가 나옵니다.’(P.141) 훌륭한 행정인 판탈레온은 절차에 복종했고, 동시에 성실했다. 매춘에 대한 가치판단을 일절 하지 않는다. 대신 감정을 완전히 배제한 건조한 보고서로 업무를 진행한다. 이런 식으로.


본인은 이키토스에 있는 또 다른 야간업소인 ‘밀림’에서 우연히 그것을 마시게 되었는데, 즉시 그것이 딱딱해졌고, 굉장한 열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제심과 마음의 평정을 되찾기 위해 아직 그것이 줄어들지 않은 상태로, 앞서 언급한 업소의 불편한 화장실로 달려가서 사춘기 이후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혼자서 하는 악습에 도움을 청해야만 했음. (P.110)


하지만 절차에 대한 원칙적인 신봉을 탐욕적인 권력자가 이용할 때, 공무원의 직업윤리는 위기에 봉착한다. 공문도 마찬가지다. 문서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공문이란 형식이 권력자의 탐욕을 숨기기 위해, 혹은 세상의 비리를 은폐하기 위해 사용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혼 없는 공무원이란 비판이 정당성을 획득한다. 판탈레온의 본말전도도 시간이 갈수록 심화된다. 점점 절차에 대한 신봉의 폐해가 커져갔다. 판탈레온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고민하지 않은 채, 너무나 필사적으로 특별봉사대 일에 매달렸다. 성공의 역설이 발생한 것이다.


‘부인의 아들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상당한 책임이 있습니다. 적어도 그 자는 그걸 엉망으로, 그러니까 아주 불완전하게 조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바보는 특별봉사대를 육군에서 가장 효율적인 조직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P.272)


생산 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모든 직장인은 숙명적으로 밥벌이의 비루함을 견뎌내야 한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이유로 판탈레온의 모든 행동을 끝까지 옹호할 수 없다. 미끄러운 경사길에 발을 잘못 디뎌 아래로 굴러 떨어지더라도, 어느 순간에는 멈춰야 할 지점을 정해야 한다. 즉, 영혼 없는 공무원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어디인가. 다행히 판탈레온 대위는 그 선을 보여준다. 판탈레온 대위는 자신의 부하였던 매춘부가 죽자, 그녀를 위해 성대한 군 장례를 치러준다. 이 사건은 특별봉사대 창설을 주도했던 장군들을 분노하게 만든다. 한 마디로 ‘군대 쪽팔리게 그런 갈보의 장례식 따위를 성대한 군장으로 치르냐’는 것이다.


“그녀가 아니라 다른 봉사대원이 희생되었더라도 저는 동일한 의식을 치렀을 겁니다. 그건 제 의무이기도 합니다.... 불과 두 달 전에 육군은 말에서 떨어져 죽은 의사 페드로 안드라데에게 군장 의식을 치러주었습니다....
“지금 귀관은 특별봉사대의 갈보들이 군에 배속된 의사들과 동일한 지위에 있다고 에둘러 말하려는 건가?” (p.341)


휴머니스트. 커트 보니것이 여러 번 강조했던 것처럼,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사랑이 인류의 절멸을 막아줄 것이며, 동시에 영혼 없는 공무원을 악행의 수렁에서 건져 내줄 수 있다. 최소한의 휴머니스트가 되는 일.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 타인의 비극적인 아픔을 자신의 상황으로 병치시킬 수 있는 감정적 능력, 끝으로 이성의 퇴화 작용을 막아줄 최소한의 지식이 필요하다. 기계적으로 복종하던 판탈레온이 단 한 번 수뇌부에 반항했던 순간, 사람의 목숨을 기계 부품 손실처럼 여기던 반인간적 결정 앞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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