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데미안>
나는 당시에, 열여덟 살의 평범치 않은 젊은이였다. 수백 가지 일에서 조숙하고, 다른 수백 가지 일에서 몹시 뒤처지고 무력했다. 때때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 자주 우쭐하고 교만했으나, 또 꼭 그만큼 자주 의기소침하고 굴욕스러워졌다. (P.146)
인용의 ‘열여덟’이란 숫자를 다른 숫자로, 그러니까 마흔둘이랄지 예순다섯으로 바꿔도 맥락에 문제가 없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가.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한 혼란과 방황을 사춘기의 특징이라고 본다면, 사춘기는 10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린 죽을 때까지 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할 테니. 차이가 있다면 40대의 사춘기는 보다 온건하다. 답을 찾기 힘들 거란 걸 예상하고 있다. 게다가 겁도 많고 신경 쓸 것도 많은 나이다. 하지만 최초의 사춘기는 맹렬하다. 어떻게든 답을 찾고 말겠다는 집념 아래 파괴적인 공격성을 드러낸다. 사춘기는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스러운 시기다.
명성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을까. 싱클레어의 성장을 그린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실망스러웠다. 마치 이광수의 <무정>을 읽는 것처럼, 지나치게 계몽적인 느낌이 들었다. 니체의 사상을 문답 형식으로 풀어쓴 책 같기도 했다. 소설 속 데미안이나 에바 부인은 실재할 것 같지 않은 인물이다. 인간미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역자도 해설에서 ‘명료하지 못한 언어와 지나친 상징성이 비판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그나마 몰입할 수 있었던 건, 소설 중반부터는 등장하지도 않는 이름 없는 조연, 즉 싱클레어의 아버지에 감정 이입했기 때문이었다. <데미안>은 언젠가 부모가 겪게 될 사춘기 수난의 예언서다.
부모에겐 강력한 편집권이 있다. 부모는 아이들이 바라보게 될 세상을 자신의 기준으로 편집해서 제공한다. <데미안>에서 ‘두 세계’로 표현된 것처럼, 부모는 세상의 일부를 아이들에게 숨긴다. 실제로 어려서부터 모든 세상을 알 필요가 없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여준답시고, 미취학 자녀와 19금 영화의 베드신을 보며 인류의 성생활을 논할 수 없는 거 아닌가. 하지만 부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언젠가 숨겨진 나머진 세상도 알게 된다. 나아가선 부모의 편집권으로 완성된 신문의 1면을 찢기도 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부모의 프레임을 아이에게 강요할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최초의 사춘기다.
「생각이란, 우리가 그걸 따라 그대로 사는 생각만이 가치가 있어. 너의 <허용된 세계>는 세계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것을 넌 알았어. 그리고 두 번째 절반을 감추려고 했어. 신부님들과 선생님들이 그러듯이. 넌 그걸 감추지 못할 거야! 누구도 안 돼, 한 번 생각하기를 시작하고 나면 말이야.」 (P.85)
인간은 근본적으로 변화를 싫어한다. 자녀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아이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이는 이미 아버지의 편집권 너머 세상을 알게 됐음에도, 부모는 부지런히 아이의 시선을 가리려 애쓴다. 포르노 세계에 진입한 아이 앞에서, 진한 키스신이 나온다고 TV 채널을 돌리는 부모의 모습이랄까. 그런 부모의 노력은 아이의 눈에 얼마나 초라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이겠는가. 아이는 조금씩 부모의 권위를 무너트릴 내면의 경멸을 쌓아간다. 하지만 부모는 그 사실도 모른 채, 관성대로 편집권을 행사한다. 싱클레어 부모처럼.
거의 모든 부모들처럼 우리 부모님들도 말없이 덮어두며 눈뜨는 생명의 충동을 모른 척하였다. 그들은 다만 다함없는 세심한 배려를 기울여, 현실을 부인하며 점점 더 비현실적이고 위선적으로 되어가는 어린이의 세계 속에 좀 더 머무르려는 나의 절망적인 시도들을 도와주었을 뿐이다. 부모라는 존재가 이 점에서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니 내 부모님을 비난하지는 않겠다. 자신을 다스리고, 나의 길을 찾아내는 것은 내 자신의 일이었던 것이다. (P.66)
<데미안>에서 가장 유명한 문구는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P.123)이다. 사춘기의 불가피성을 적확하지만 예술적으로 표현했다. 그렇다. 어른이 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은 알에서 나와야 한다. 인위적으로 그 과정을 막을 수도 없지만, 막아서도 안 된다. 아이가 자기 인생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 자신만의 규칙을 만드는 건 중요한 일이다. 문제는 알에서 나오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부모가 겪게 될 상실감이다. 편집권의 상실, 나아가 아이가 혼자서 비상하게 될 미래의 두려움까지. 물론 투쟁 과정에서 동반되는 대책 없는 사춘기의 일탈과 폭력성을 견뎌내는 일도 만만치 않다.
자녀의 사춘기를 무탈하게 보내기 위해선, 우선 사춘기 특유의 나르시시즘을 온전히 이해해야 한다. 술집을 전전하며 정학 위기에 놓였던 싱클레어는 자신의 행동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세상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내 나름의 저항의 형식이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망가뜨렸고, 이따금씩은 내 일을 대략 이렇게 보았다. 세상이 나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나 같은 사람들에게 줄 좀 더 나은 자리, 좀 더 높은 과제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이제 나 같은 사람들은 이렇게 망가지는 거라고. 세상이 손해를 보겠지 뭐. (P.104)
(이런 심리상태를 받아들여야 한다니...) 그다음엔 사춘기를 자연의 섭리로 인식해야 한다. 사춘기는 1+1=2만큼 자명한 자연의 진리다. 그 누구도 1+1=2라는 공식 앞에서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는다. 사춘기의 철없음을 비슷한 태도로 받아들여야 한다.
술독에 빠져 살던 싱클레어에게 아버지는 ‘욕을 하시다가 애원을 하시다가 어머니를 상기시키셨’다. 곧 격분하고 감화원에 처넣겠다고 협박했지만, 싱클레어는 ‘그러시라지!’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셨다’ (P.103) 감정적 분출은 효과가 없다. 대신 데미안은 술에 취해 건방 떨던 싱클레어에게 별다른 조언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현실성 없는 말이긴 하나....)
지금 싱클레어에게 가장 큰 어려움이 닥쳐 있어요. 그 애는 다시 한번 공동체 속으로 도피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어요. 심지어 술집 단골이 되었어요. 그러나 그렇게는 안 될 겁니다. 그의 표적이 가려져 있지만, 그 표적이 아무도 모르게 그를 불태우고 있습니다. (P.190)
새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을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아이와 부모는 한 몸 같아서, 남의 집 자식 훈수 두는 것처럼 차분하게 반응하는 게 쉽지 않지만, 결국 방법은 이뿐이다. 결국 나 자신을 믿듯, 데미안이 싱클레어를 믿었듯, 아이를 믿어야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