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애트우드 <그레이스>
선생님, 글로 적혀 있다고 해서 모두 주님의 진실인 건 아니에요. 내가 말한다. (P.378)
뒷담화는 태초의 욕망이었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 지어 준 첫 갈림은 소문을 전달하고픈 바람에서 비롯됐다. 인간은 어렵사리 얻은 뒷담화 능력을 방치하지 않고 무던히 발전시켰다. 인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른 동물이 갖지 못한, 허구 창작 능력을 뒷담화에 결합시켰다. 그리하여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무수한 소문이 탄생했다. 소문은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머무르지 않았다. 때론 소문이 현실을 창조하기도 했다. 소문의 진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소문을 다수가 믿을 때, 소문은 그 자체로 진실이 됐다.
허구의 소문, 즉 헛소문은 단순한 즐거움 대상이 아니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헛소문은 한 개인의 사회적 생사를 결정할 힘이 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그레이스>는 소문의 위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19세기 캐나다에서 발생한 실제 살인 사건에 바탕을 둔 <그레이스>는, 살인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주인공 그레이스 마크스의 미스터리한 행적을 쫒는다. 그레이스 마크스는 순수를 위장한 악독한 살인마인가, 아니면 가혹한 누명을 뒤집어쓴 희생자인가. 그레이스는 자신의 범행을 부인한다. 하진만 진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소문은 그녀를 살인마로 규정했으며, 언론이 이를 확대재생한 하고, 법원이 소문을 사실로 규정했다. 소설 속 소문의 힘은 강력하다.
내가 어떤 짓을 저질렀느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유죄나 무죄가 결정된다는 것을 그는 아직 모른다. (P.556)
오늘날 소문을 기록하고 전달하는 건 기자나 소설가만이 아니다. 바꿔 말하면 소문이 폭증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게다가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에 비해 정보가 부족하다. 소문을 가려듣는 현명한 지혜가 특히나 요구되는 시점이다. 최악의 유형이자, 가장 마음 편한 방식은 듣고 싶은 대로 듣는, 소위 소문 창작파다. 그들에겐 소문의 내용 자체가 중요치 않다. 자기만의 프레임으로 소문을 분해하여 재구성하고, 때론 창작한다. 요즘 ‘기레기’라 욕먹는 수준 낮은 기자들의 전형적인 특성이다. 뒷담화 욕망이 가장 극대화된 버전으로,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 때조차 자신의 이야기 욕망이 작동한다. 19세기 캐나다 기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나 보다.
그건 제 진술서라고 할 수 없어요. 내가 말한다. 변호사가 시키는 대로 한 거고 신문기자들이 지어낸 거라, 신문사에서 팔아먹는 쓰레기 같은 전단지를 보고 진술서라고 하는 게 차라리 나을 거예요. 처음 신문기자를 봤을 때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세요? 너희 어머니는 네가 여기 있는 거 아시니?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나만큼 어리고, 수염을 깎을까 말까 한 나이니 신문에 실음 직한 글을 쓸 수나 있겠어요? 다들 그렇게 솜털이 보송보송했고, 진실과 마주치더라도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P.154)
물론 소문 창작파를 무작정 비난할 수 없다. 이야기는 태초의 욕망이 아니었던가. 특히 그레이스 마크스의 사건처럼, 상상력을 자극하는 범죄는 더 위험하다. 주인을 사랑하는 하녀, 주인의 사랑을 받는 또 다른 하녀, 하녀 사이의 질투, 하녀를 사랑하는 또 다른 남자 하인. 그들 사이의 사각 관계에서 발생한 치정 살인. 그레이스 사건은 그 자체로 인간의 허구적 욕망을 건드린다. 캐나다 초기 생활을 기록하던 무디 여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심지어 사실을 날조하여 그레이스 사건을 자극적인 통속극으로 변모시켰다. 무디 여사의 기록을 참고로 CBC에 드라마 <하녀> 대본을 썼던 마거릿 애트우드는 약 20년 후 <그레이스>를 다시 집필한다. 소설 <그레이스>는 애트우드가 써 내려가는 일종의 정정보도인 것이다.
물론 소문을 곧이곧대로 듣는 것도 문제다. 정직하게 듣기만 해도 된다면 기자만큼 쉬운 일은 없을지 모른다. 모든 이야기 뒤에는 발화자의 욕망이 숨겨져 있다고 말한 사람이 라캉이었던가. 소문을 전달하는 사람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욕망이 이야기의 내용을 편집한다. 때문에 소문의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선 말하는 사람이 처한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그의 이야기가 어느 방향으로 왜곡될 가능성이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레이스가 조던 박사에게 전한 이야기는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일까. 그레이스는 스스로 죄가 없음을 드러내야 할 맥락에 놓여있다. 이야기를 왜곡할 사유가 충분한 셈이다.
인간의 머리는 집과 같아서 주인이 내보이고 싶지 않거나 아픈 기억을 자극하는 생각들은 안 보이는 곳으로 밀어내고 다락방이나 지하실에 넣어 버린다. 그리고 망가진 가구를 보관할 때 그렇듯 망각에도 분명 의지가 작용한다. (P.531)
소문엔 시대의 한계도 담겨있다. 인간의 왜곡 성향은 꽤 비겁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의 소문일수록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약자에 대한 시대의 편견을 늘 감안해야 한다. 예를 들어 그레이스는 미망인들에 대한 소문은 가급적 믿지 않는다. 본인이 헛소문의 피해자이기도 했지만, 미망인을 바라보는 사회의 편견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소문 전달자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도 헛소문을 걸러내는데 도움이 된다. 그레이스는 자신이 모시는 주인을 욕하는 도라를 보며 ‘자기가 모시는 사람들을 뒤에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데 그레이스, 너를 두고는 뭐라고 하겠니’(P.447)라며 경계한다. 뒷담화가 잦은 사람의 말은 일단 걸러 듣는 게 좋다.
소문(뉴스)은 진실을 얼마나 담고 있을까. 알 수 없다. 때론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완전한 허구를 창조한다. 소문을 제대로 걸러 듣는 방법이 어려운 이유다. 기자는 진실의 실체가 희미한 상황에서도 판단을 내려야 한다. 얼마나 어렵겠는가. 훌륭한 기자가 많지 않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렇다면 애매모호한 소문 앞에서 일반인은 어떤 자세를 유지하는 게 좋을까. 위에서 언급한 방법들을 다 써본 뒤에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면 판단을 유보하는 게 어설픈 판단보다 훨씬 낫다. 최소한 큰 망신은 피할 수 있으니. 진실은 늘 우릴 따돌린단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는 진실이 무엇인지 파악이 안 되는 상황이라 진실을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 뭐라고 분명히 단언할 수가 없다. 어쩌면 파악할 수 없는 대상은 그레이스인지 모른다. 그녀는 딱 손이 닿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앞에서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그가 계속 따라오고 있는지 뒤를 돌아보고 확인한다. (P.5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