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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판에서 지지 않는 방법

슈테판 츠바이크 <체스 이야기>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by 알스카토

대통령의 방중訪中을 ‘홀대론’이란 프레임 속에 집어넣는 야당의 모습을 보며 다시금 놀랐다. 그들의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 세월호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대통령과 여당은 두 번의 선거 이후 서서히 행동을 바꿔갔으며, 전술적으로 영리하게 변화의 근거를 만들어갔다. 당시 야당이 조커를 들고 있다며 자신 만만해하는 사이, 권력은 슬며시 게임을 포커에서 고스톱으로 바꿔치기한 셈이었다. 어느 순간 세월호를 얘기하는 사람은 반정부 세력이 되어버렸다.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짜증 났지만, 마키아벨리의 시선에서 보자면 황홀할 정도로 현란했다. 논리적 정당성에 매몰돼있던 세력은 정치에서 패배했고, 그들에게 기댔던 사람들은 허망해졌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에서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뒤에서 주무르던 패덕자 조지프 푸셰의 삶을 역사의 무대로 끌어올린다. 로베스피에르와 나폴레옹에 밀려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지 못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훨씬 더 오래 지녔던 냉혹한 실용주의자를 두고 츠바이크는 다음과 같이 평한다. ‘푸셰의 보기 드문 고유의 천재성은 차가운 피에 있다. 육체가 그를 방해하는 일도 없고 육체가 그의 마음을 격동시키는 일도 없다. 말하자면 육체는 이 대담한 정신의 역할에서 그 기능을 미치지 못한다.’(P.25) '근세에 있어서 이 가장 완전한 마키아벨리스트의 성격, 아니 그 무성격이 나를 사로잡았다.' (P.11) 핵심은 무성격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의 마지막 소설 <체스 이야기>에서 푸셰의 무성격이 어떻게 마키아벨리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체스왕 젠토비치를 통해 명확히 보여준다. 지적으로 박약에 가까웠던 젠토비치는 체스 영역에서만큼은 천재성을 발휘한다. 우연히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하는 배에서 젠토비치를 만난 사람들은 그와 체스 대결을 펼친다. 집단 지성으로 젠토비치를 꺾어보려 했던 것. 게임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츠바이크의 분신인 화자는 조지프 푸셰에게 끌렸던 호기심을 발동시키며, 젠토비치를 이렇게 묘사한다.


‘어떤 종류든 편집광적으로 단 한 가지 생각에 갇힌 인간들 모두에 대해 나는 평생 호기심을 느껴왔다. 한 사람이 자신의 영역을 제한하면 할수록 다른 한편에서는 무한성에 더더욱 가까이 다가가기 때문이다. 얼핏 보기에는 세상을 등진 것 같은 그들은 자기만의 특별한 재료로 흰개미처럼 기이하고 유일무이한 하나의 압축된 세계를 만든다.’ (P.18)


젠토비치와 대결하는 소설 속 매코너같은 부류의 사람은 백 번을 싸워도 이기지 못한다. 상상력을 발휘하고, 감정을 표출하며, 이성적 주장을 펴는, 다시 말해 자신의 능력을 고루 분산하는 일반인들이, 성격적 영역을 제한하며 다른 한 편, 즉 정치의 영역에서 무한성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하는 상대를 어떻게 이기겠는가. 나는 당시 세월호 특별법을 두고 현재의 권력이 보여준 화려한 마키아벨리적 전술에서 조지프 푸셰의 무성격과 젠토비치의 화려한 체스 실력을 떠올렸다. 학생들이 천천히 물에 빠져 죽어가는 모습이 생중계됐을 때, 다수의 범인들은 매코너적 반응을 보였고, 권력은 젠토비치의 한 수를 두었다.


<체스 이야기>에는 B박사가 등장한다. 영혼을 압박하는 무(無)의 감옥 속에서 버티기 위해 그는 체스 교본을 읽었고, 나아가 상상의 영역에서 체스를 재현했으며, 결국 자기 자신과 상상의 체스를 두는 분열적 경지에 도달한 인물이다. 젠토비치와 B박사는 운명의 체스 게임을 둔다. 상상 속에서 자기 자신과 수천 번의 게임을 둔 B박사는 젠토비치를 체스판 안의 게임에서 이긴다. 하지만 워낙 복잡하게, 여러 수를 앞서가며 뒀기 때문에 게임의 승패를 알 수 있는 건 체스 천재 둘 뿐이다. 젠토비치 자신은 게임에서 진 것을 알고 있지만 다수 관중은 모르는 상황, 결국 체스판 밖에서의 게임은 무승부다. 이제 무성격의 소유자 젠토비치는 B박사의 불안정한 감정을 파고든다.


그는 뭔가를 무척이나 즐기는 것 같았다. 그의 입술에 만족스러운 듯 냉소가 천천히 번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미처 이해하지 못한 승리를 마음껏 즐기고 난 뒤, 그는 짐짓 공손한 척하면서 우리 쪽을 쳐다보았다.
“유감스럽게도 전 여기서 체크를 전혀 보지 못하겠는데요? 혹시 여러분 중에서 제 킹에 대한 체크를 보신 분이 있나요?” (P.83)


정치인에게 중요한 건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대중의 사실 인식이다. 정답이 필요한 게 아니라 가장 정답처럼 보일 답이 필요한 거다. 젠토비치는 정치의 속성을 알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현실 감각이 떨어지고, 이론적으로 완벽한 체스를 두지만, 실제 체스는 거의 둔적 없는, 즉 이론적으로 완벽하지만, 심약한 정신분열적 증세로 승기 잡은 게임조차 현실에서 이기지 못하는 B박사의 모습에선, 진보 야당의 모습이 연상됐다. 츠바이크는 <체스 이야기>에서 말한다. 체스판 밖에서 B박사는 결코 젠토비치류의 인간을 이길 수 없다고. 결국 세월호 특별법은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상대와 싸웠는지도 모른다.


조지프 푸셰 평전을 쓰며 츠바이크는 서문에서 고전적인 영웅이 아닌 부도덕한 남자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이유를 밝힌다.


‘위인이나 영웅은 다만 존재하는 것만으로써 수십 년, 수세기를 거치는 동안 사람들의 정신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적인 면에서 뿐이다. 실제 생활에서나 정치라는 힘의 영역에서 그것이 좌우하는 일은 드물다.... 오히려 가치는 떨어지지만 교활한 족속의 인간, 즉 흑막의 인간이 결정권을 쥐는 경우가 많다.... 나폴레옹은 이미 100년 전에 말한 바와 같이 “정치”라는 것이 현재의 숙명, 새로운 운명이 되어버렸다면 우리들은 자기 방어를 위해서 이들 힘의 배후에 숨어있는 사람들을 알아야 하고 그들의 위험한 힘의 비밀을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P.12-13)


학자가 아닌 정치인이라면, 츠바이크가 알아내고자 했던 ‘위험한 힘의 비밀’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권력을 갖지 못한 정치세력만큼 허망한 게 없으니. 이게 과연 실제 정치판에만 적용될 이야기일까. 정치가 벌어질 수 있는 모든 분야도 마찬가지다. 절이 싫은 중이, 절을 떠날 게 아니라면, 값싼 정치 환멸 반응보단 그 정치판 안으로 뛰어들어, 츠바이크가 말했던 푸셰의 ‘위험한 힘’을 잘 활용하는 게 훨씬 실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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