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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비극의 반복을 막는 방법

한강 <소년이 온다>

by 알스카토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만난 두 개의 악. 하나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인간성에 숨겨진 악의 결정체다. 네 명의 고등학생과 한 명의 중학생이 무기를 버리고 두 손 들어 항복하러 도청에서 내려왔을 때, 그들을 향해 망설임 없이 M16을 갈기며 한 장교는 말했다. ‘씨팔 존나 영화 같지 않냐.’ 광주에 나타났던 악마는, 사실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 봤을 때 그다지 특별하진 않다. 때론 꽃다운 나이의 청년도 악마가 된다. 1940년 이탈리아에서 반파시스트 저항군의 뒤통수에 구멍을 냈던 건 15살의 파시스트 소년병이었다. 인간이 악마가 되어 지옥을 만든 건 늘 있어왔다. 슬프게도. 그저 잘 숨겨왔을 뿐.


학살자 전두환을 타도하라.
뜨거운 면도날로 가슴에 새겨놓은 것 같은 그 문장을 생각하며 그녀는 회벽에 붙은 대통령 사진을 올려다본다. 얼굴은 어떻게 내면을 숨기는가, 그녀는 생각한다. 어떻게 무감각을, 잔인성을, 살인을 숨기는가. (P.77)


두 번째 악은 여성 노동자의 권익 보호 운동에 앞장섰던 선교회 소속의 한 활동가 입에서 나온다. 기억을 더듬는 것조차 쉽지 않던 후배에게 침착하게 내뱉던 말.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니.’‘나라면 너처럼 숨지 않았을 거야, 나 자신을 지키는 일로 남은 인생을 흘려보내진 않았을 거란 말이야.’ 30센티 자와 M16의 개머리판이 자궁입구를 찢고 짓이겨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켰던, 광주를 몸으로 경험한 동료에게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 세상에 증언하라며 던진 말이었다. 순수한 운동가가 보여준 악은 우리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소년이 온다>의 두 번째 악, 성희 언니의 폭력은 히틀러나 전두환처럼, 우리가 막연히 떠올리는 악과 확연히 다르다. 주변에 공기처럼 존재하는 익숙한 악. 일상의 악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으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우리 안에서 밖으로 나갔을지도 모를 만큼 가까이 존재한다. 여성 운동을 위해 헌신했으나 노동자의 억압은 외면하는,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투신하면서 인종차별적 폭력을 서슴지 않는, 흑인 민권을 말하면서 성희롱과 성추행에 둔감한 방식으로 이타적 인간은 일상의 악마성을 드러내 왔다. 결국 아우슈비츠의 지옥을 만들면서도 선로에 떨어진 아이를 구하는 건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한 인간의 내면 풍경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 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P.134)


만약 독실한 신자였던 성희 언니가 선주의 상처를 알았더라면. 5.18 광주에서 벌어졌던 지옥을 조금이나마 알았더라면. 혹은 가늠할 수 없는, 그리하여 표현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이라는 것의 존재 가능성을 알았더라면. 아니 최소한 자신이 잘 모를 수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신 앞에서 유한한 인간의 한계를 수도 없이 되뇄을 한 인간은, 그러나 상처받은 동료 앞에서 자신의 유한성을 망각했다. 무지했다. 무지는 쉽게 단정으로 이어진다. 유한성을 망각하면 확신이 생기고, 확신은 신념으로 발전한다. 신념은 더 이상 오류를 보지 못한다. 일상의 악은 대부분 이 틈에서 발생한다. 타인에 대한 무지.


예를 들어 일베는 인간의 어두운 면을 노크한다. 초자아에 억눌려있던 악마성은 익명의 세계에서 억압을 탈피해 기지개를 켠다. 때문에 일베의 확산 과정은 심플하다. 지식도 논리도 필요 없다. 사진 몇 장만으로 억눌렸던 악마를 해방시킬 수 있다. 반면 밖으로 나온 악마를 집어넣는 일, 다시 말해 익명의 세계에서 일베의 해악을 증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은 지난하고 복잡하다. 본능적 이끌림의 과정이 아닌 이성적 추론의 절차가 필요하다. 자신의 불행을 여성, 이민자 등 누군가의 탓으로 돌려 공격하고픈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이를 막는 건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힘, 즉, 이성이 무지의 갈라진 틈을 매워준다.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어떤 표정, 어떤 진실, 어떤 유려한 문장도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았다. 오로지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P.96)


한강은 2009년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것을 보며 ‘저건 광주잖아’라고 중얼거렸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광주는 끝난 게 아니라 모습을 바꾼 채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성희 언니가 선주에게 보였던 악마성은 소름 돋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그럼에도 해가 바뀌어 발생하는 광주의 연속은 우리를 점점 더 둔감하게 만들고 있다. 내면 가까운 곳 어딘가에 잠자는 악의 존재를 겸허하게 인지하는 일, 그리하여 본능을 거스르고 끊임없이 지식을 습득, 사색하며 옳고 그름의 기준을 붙잡는 지난한 이성의 분투가 더더욱 절실한 까닭이다.


쓰고 보니 ‘착하게 살자’만큼이나 뻔한 말이지만, 이 뻔한 말이 지금 이 시대의 유일한 대안인 걸 어쩌겠는가. 결론은 착하게 살기 위해선 마음의 도야만큼이나 중요한 게 공부라는 사실. 그게 반복되는 사회적 비극을 막는, 답답하지만 거의 유일한 방법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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