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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스카토 Sep 01. 2024

증오의 추억

0831@Metro12


인터넷 아이디라는 건 단어의 의미답게 한번 정하면 바꾸기가 쉽지 않은데, 아무래도 온라인 정체성인 아이디를 정하는 시기가 유치 찬란한 어린 시절이다 보니, hotzzang이나 tonylove0613 같은 낯 부끄러운 아이디를 성인이 된 이후에도 쓰는 경우를 종종 본다. 내 경우는 99년도, 나우누리에 개설된 대학 사이버 과방에 들어가기 위해 처음 만들었다. 대학에서 선배 동료들에게 내 첫인상을 심는 기회였기에, 상당히 신중했을 것 같지만 별로 그러지 못했다. 다만 지적으로 보여야 한다는 허세의 열망은 기억난다. 대학생이 되면 바로 어른이 될 것 같았던 그 시절, 난 영화 마니아로 내 포지션을 정했고, 4년 전 칸에서 감독상을 받았던 영화 <증오 La Haine>를 떠올렸다.


일단 불어였다. 그땐 영어만 해도 촌스럽게 느껴졌다. 누군가에게 아이디 에 관한 질문을 받고 싶었다. 젊은 천재 로망도 작동했다. 마티유 카소비츠 감독이 증오로 상을 받았을 당시 서른이 안 됐다. 게다가 당시 영화 마니아인척을 하려면 흑백영화를 봐야 했다. 졸린 눈을 부여잡고 짐 자무쉬 감독의 <천국보다 낯선>을 본 이유다. 증오의 원제 haine을 입력하니 나 같은 허세가 이미 쓰고 있어서 뒤에 출생 연도 숫자를 붙이는, 당시  누구나 쓰던 촌스런 방식을 거치고 나서야 아이디가 탄생했다. 그때는 이 아이디를 이리 오래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알았다면 훨씬 더 고심했겠지만 결과물은 비슷했을 거다)


프랑스에 와서 메일 주소를 불러줘야 할 때가 있는데, 아이디를 얘기할 때면 거의 매번 프랑스인의 표정이 굳는다. 한 친절한 아주머니는 너 이 뜻을 알고 쓰는 거냐며 뜻을 알려주기도 했다. 아나키스트적이며 반사회적인 메일 주소는, 바탕클랑 참사 이후 잠재적 테러 공포를 안고 사는 프랑스인을 충분히 당황시킬만하다. 다행히 마티유 카소비츠의 영화는 프랑스에서도 꽤 유명하기 때문에, 내가 영화라고 입을 열기만 하면 대부분 알겠다는 미소를 보여준다. 물론 허세로 만든 아이디였기에, 지금 영화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제 파리 지하철 역 곳곳에 <증오>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영화는 기억나지 않지만 저 강렬한 포스터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영화 스토리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방리유에서 방황하는 세 청년의 이야기였다. 당시 난 영화 <비트>, <트레인스포팅> 등 방황하누 청춘의 이야기에 매혹됐던,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던 청소년이었으니, haine을 아이디로 정할 이유가 하나 더 있었던 거다. 지하철역 포스터가 안내해 준 99년으로의 시간여행, 한번 찾아서 영화를 봐야겠다. 적어도 온라인 정체성의 뿌리는 알고 있어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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