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난 신발이 조금 부끄러웠던

0517@서울신문 하프마라톤

by 알스카토
@상암 월드컵 경기장 공원


한국의 달리기 열풍은 사실 내가 파리에 가기 전부터 시작됐다. 2019년였던가. 후배 따라 jtbc 10K 마라톤 대회를 참여했다. 10km는커녕 5km도 달려보지 않았던 시절. 오래전 잡아놓은 귀찮은 소개팅에 나가는 마음으로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하지만 여의도 광장은 이미 도떼기시장이었다. 사람이 많은 것도 놀라운데 머리에 젤, 왁스를 바른 남성들, 풀메이크업한 여성들이 즐비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날 통제된 마포대교 위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며 달린 뒤, 난 달리기에 빠졌다.


어제 상암에서 열린 서울신문 마라톤 대회는 5년 전보다 사람이 더 많게 느껴졌다. 출발 직후, 코스 초반엔 연휴 귀성길 차량정체 같은 인파정체에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나중에 기록을 보니 이날 10K에 참석한 사람만 약 7,000명. 하프와 5K를 합치면 만 명이 충분히 넘었을 게다. 러닝 다음 날, 딸은 '아빠 차은우 봤어'라고 묻는다. 알고 보니 같은 날 여의도에서 현대자동차 주최 포레스트런이 열렸다. 그러니까 어제 대회에 참여한 러너가 어림잡아 15,000명을 훌쩍 넘었던 거다. 참여신청을 미리 못한 나는 당근 마켓에서 배번을 구매해 뛰었는데, 대회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에누리 없이 판매되고 있었다.


난 2020년에 구매한 써코니 엔돌핀 프로2를 신고 뛰었다. 러닝화는 내구성이 약한데, 오래 신다 보니 신발 앞에 꽤 큰 구멍이 났다. 검정 양말로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구멍이 커졌는데,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의 화려한 러닝화 때문에 그 구멍은 더 크게 느껴졌다. 사실 프랑스에선 패션과 관련해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자신의 옷과 똑같은 걸 다른 사람이 입은 걸 발견하는 일. 다른 하나는 새 옷을 입거나 새 신발을 신는 일. 옷이 낡을수록 그리고 독특할수록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게 파리지엥인데, 어제 나는 그 두 조건을 충족했음에도 조금 부끄러웠다. 아무래도 구멍 때문인 것 같았다. (서울 때문은 아녔겠지)


같이 뛴 친구는 일본에서 사 온 아디제로4를 신었는데 아디제로는 정말 많이 보였다. 마치 아디제로 그룹이 따로 있는 것처럼. 나이키, 호카, 뉴발란스의 러닝화들도 하나같이 색깔도 화려했고, 전날 세탁특공대에 맡긴 것처럼 반짝거렸다. 사실 내가 신은 엔돌핀 스피드는 써코니 러닝화의 최고 사양 모델이라 주눅 들 필요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못난 주인은 마치 맨발의 아베베인양 굴었던 게다.


예전 해발 600여 미터의 청계산에 오르는 한국 등산객들의 최고급 장비가 화제 된 적이 있었는데, 장비빨은 우리 DNA에 새겨진 민족적 특성이려나. 서울신문 마라톤에 참가한 뒤, 나도 한민족의 후손답게 기세등등한 새 카본화 하나 구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안하다 구멍 난 나의 5년 지기 러닝화여.


굿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