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5@Banpo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에 왔구나 싶었다. 게이트를 빠져나가는 승객들의 걸음걸이 속도가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이 정도 보행 속도면 인파를 가로지르는 청새치가 되고도 남았어야 했는데, 아무리 속도를 내도 난 그저 고기 떼 무리에 합류한 전갱이 신세였다. 그렇다. 모두가 나와 비슷한 속도로 걷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에선 모두를 제치며 빠르게 공항을 활보했건만) 짐을 찾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넘지 말라는 선을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나 역시 짐 벨트 위에 거의 올라가다시피 접근해서 내 짐을 찾아야 했다. 아 이게 선행의 원리구나. 초2 때 누군가 초3 수학을 시작하자 뒤이어 초4, 초5 수학을 하는 사람이 나타나고, 결국 초등학생이 고등학생 수학을 하게 되는 그 원리. 수화물 벨트 앞 라인이 무의미한 것처럼, 모두가 그 선을 넘으면, 선의 의미가 사라진다.
한국에선 러닝이 열풍이라더니, 동네 운동장은 러너들의 성지가 돼있었고, 급기야 운동장 관리자는 5인 이상의 동반 러닝을 금지했다. 새로운 현상을 촬영하기 위해 뉴스 카메라가 나타났고, 기자와 러너 사이의 충돌이 발생해 경찰이 오기도 했다. 사실 파리도 러너의 천국이라 했지만, 구립종합운동장은 말 그대로 러너의 메카였다. 최고급 러닝화와 나이키 모델 같은 옷을 입은 러너들은 서로의 지구력을 북돋아주기 위해 소리를 질렀고, 동호회의 누군가는 이 모든 과정을 찍고 있었다. 나는 인파 사이에서 혼자 뛰고 있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위축이 됐다. 인터벌 훈련을 하는 러너들의 속도에 한번, 그들이 착용한 장비에 한번, 외톨이가 된 느낌에 한번. 5인 이상 달리기를 금지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6개월이 지나고, 다시 봄이 찾아왔다. 역시나 규정은 모호해졌고 군단급 러너 무리들은 다시 운동장을 지배했다. 조금은 짜증이 났다. 그들이 물리적으로 공간을 지배해서가 아녔다. 내 마음이 문제였다. 마치 정장을 입고 참석해야 하는 격조 있는 행사에 츄리닝을 입고 온 느낌이 들어 민망했다. 가끔은 그들의 기합에 페이스가 무너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달리기에 이토록 진심인 이들의 열정이 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천천히 달리며 그날의 스트레스를 날리는 대신 나도 5분/km 아래로 뛰고 싶단 경쟁심이 생겼고, 카본화도 사고 싶어졌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금방 마음이 피곤해졌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일이란 말인가.
이런 열정과 진심이 한국을 빠른 기간 선진국으로 만들었겠지만, 그래도 가끔 어떤 순간엔 잠시 진심을 창고에 넣어두고 모두가 설렁설렁할 순 없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달리기에도 이렇게 진심인 사람들이 생존의 이슈 앞에선 얼마나 더 진심으로 열정을 발휘하겠는가. 그러니 나도 매 순간 최대 마력으로 엔진을 풀가동하는 수밖에. 아무리 빨리 걸어도 사람들을 제칠 수 없는 나라에 돌아왔다. 웰컴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