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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있는 나날>

by 알스카토
내 가슴은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쓴 이 짧은 문장 하나에 감정이 울컥했다. <남아 있는 나날>을 통틀어 가장 감정적인 이 문장이 그렇다고 격정적인 맥락 속에 있던 것도 아니었다.

‘켄턴 양의 말을 제대로 소화하는 데 1-2분 정도 걸렸으니까. 게다가 그녀의 말에는, 여러분도 짐작하겠지만 내 마음에 적지 않은 슬픔을 불러일으킬 만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이제 와서 뭘 숨기겠는가? 실제로 그 순간, 내 가슴은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저 문장이 등장하는 순간, 달링턴 홀의 훌륭한 집사였던 스티븐스가 세웠던 공들인 탑은 무너졌다.


소설은 한 남자의 회고다. 일종의 자서전인 셈이다. 달링턴 홀의 집사 스티븐스는 전 세계에 영향력을 끼친 결정들이 이뤄지던 격동의 현장에서 주인을 모시며, 품위 있는 집사의 자격이 무엇인지를 논했던 인물이다. 스티븐스는 자신의 직업적 의무는 주인의 뜻을 맞추는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작게나마 기여하고자 ‘우리 시대의 위대한 신사’를 섬기려 했던 ‘이상주의적 세대’다. 하지만 그가 모시던 위대한 신사가 죽고, 직원이 스무 명 넘던 달링턴 홀은 네 명의 직원만 남긴 채 미국 신사에게 팔렸다. 스티븐스의 회고가 시작되는 지점은 바로, 위대했던 과거의 영화를 뒤로한 채 영락한 가문의 집사로 견뎌내고 있는 그 순간이다.


스티븐스는 꽤 오랜 시간 무엇이 품위 있는 집사인지에 논하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다.

‘품위는 자신이 몸담은 전문가적 실존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집사의 능력과 결정적인 관계가 있다. 모자라는 집사들은 약간만 화나는 일이 있어도 사적인 실존을 위해 전문가로서의 실존을 포기하기 마련이다.’

우아하면서도 현학적인 스티븐스의 품위에 대한 결론은 한 마디로, 공과 사의 엄격한 구분, 개인의 감정을 감출 수 있는 엄격한 직업적 윤리를 의미한다. 얼핏 줄거리와 상관없어 보이는 품의에 대한 그의 장광설은 사실 그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세우기 시작한 탑의 기초공사다. 품위론을 통해 자식의 도리나 사랑의 포기는 직업적 품위를 지키기 위했던 노력으로 승화될 수 있다.


그가 모시던 달링턴 경이 미국 신사에게 ‘선생이 아마추어리즘이라고 설명하는 그것을, 내가 보기에는 여기에 계신 신사분 대다수는 아직 명예라고 부르고 싶어 합니다.’라고 충고할 때만 해도, 품위를 위한 스티븐스의 전문가적 실존은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명예를 아마추어리즘으로 부르는 시대로 변해갔고, 아마추어리즘을 명예라 부르고 싶어 하던 주인 달링턴 경은 하인들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해고하며 자신의 명예가 허울뿐임을 드러낸다. 이제 스티븐스에게 필요한 건 집사의 품위가 아닌 의무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집사의 의무는 훌륭하게 봉사하는 것이지 중대한 나랏일에 끼어드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스티븐스의 정당화는 계속된다.


스티븐스의 회고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러니까 달링턴경의 아마추어적인 행동을 거칠게 비판하던 카디널 씨에 기억이 이르자 더욱 궁색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이 모시던 달링턴 경이 나치들에게 조종당하던 순간을 지적할 때에도 스티븐스는 ‘죄송합니다 도련님, 저는 나리의 훌륭한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말씀밖에 드릴 게 없습니다.’라고 답할 수 없다. 하지만 카디널 씨의 지적대로 달링턴 경은 몰락하고, 한 때 품위를 논하며 지키던 이상주의적 세대의 꿈도 무너진다. 그럼에도 스티븐스는 회고란 방식의 정당화를 통해 그동안 살아왔던 자신의 삶의 명분을 간신히 지탱한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명분을 한 순간에 무너트린 것은 켄턴 양의 고백이었다. 켄턴 양의 고백을 듣던 순간, 그는 회고로 정당화할 수 없는 삶의 궤적을 응시해야 했다. 갈갈이 찢어지는 가슴은, 단순히 한 때 잡지 못하던 사랑에 국한된 것이 아닌, 떠나간 사랑과 함께 정당화될 수 없는 삶의 궤적을 응시할 수밖에 없는데서 비롯됐다. 어떻게 해서든 정당화하고 싶던 삶의 민낯을 바라보며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순간의 비통함을 가즈오 이시구로는 ‘내 가슴은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는 평범한 문장에 담아냈고, 나는 울컥했다. 게다가 평생의 삶을 스스로 부정하고 무너트릴 수 있는 솔직함의 용기는 스티븐스에게만 없는 것이 아니지 않던가. 켄턴 양의 고백 앞에서 스티븐스의 정당화는 무너진다.


‘우리는 눈을 가린 채 현재를 지나간다. 기껏해야 우리는 현재 살고 있는 것을 얼핏 느끼거나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나중에서야, 눈을 가렸던 붕대가 풀리고 과거를 살펴볼 때가 돼서야 우리는 우리가 겪은 것을 이해하게 되고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

밀란 쿤데라의 말이다. 회한의 슬픔은 피할 수 없는 실존적 비극이다. 스티븐스의 후회가 더 안타까운 건 그래서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후회는 끝이 아닌 시작임을 ‘남아 있는 나날’이란 제목을 통해 희망적으로 마무리하지만, 남아있는 나날이 얼마 없을 시기에 후회하는 일은 그럼에도 견디기 힘들다. 그러니 방법은 자주 삶을 되돌아보고 후회를 하며 회한의 주기를 짧게 하는 수밖에. 솔직하게 삶을 직시하고, 쓸데없는 자기 정당화는 피하는 수밖에. 그것이 스티븐스처럼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자, 후회의 효과적인 사용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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