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문 <어떤 작위의 세계>
의미와 무의미가, 존재와 비존재가, 우연과 필연의 차이가 사라져 경계가 모호한 그 작위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맥락이 없었고, 뭔가가 일어나도 그만이고 일어나지 않아도 그만이었다.(P.190)
바로 여기가 정영문의 <어떤 작위의 세계>의 출발점이다. 세상은 더 이상 어떠한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한다. ‘나는 왜 사는가’란 질문에 답이 사라진 것이다. 존재 이유가 사라진 허무주의의 심연엔 절망만이 남아있다. 여기서 과연 인간이 무엇을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작위의 세계> 화자의 난관은 여기서 시작된다.
언젠가 이후로 아무리 해도 마음에서 우러나 기꺼이 하고 싶은 것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 삶의 가장 큰 실질적인 어려움이 되었고, 그 어려움을 늘 상대해야 했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상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을 마지못해 할 수 있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P.133)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것도 없는 허무한 상황. 어떠한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세상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일은 가혹하다. 그래서 화자는 결정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심혈을 기울여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심혈 같은 것은 기울이고 싶지 않았다. 모든 의지가 잔인하고 가혹하게 느껴졌고, 의지야말로 잔인하고 가혹한 것 같았다.(P.250)
화자는 행동 대신 사색을 선택한다. 사색은 어떤 의미를 창출하기위한 시도가 아니다. 무의미의 신이 가져다 준 영겁의 시간을 보내기 위한 수단이다.
나는 내가 얼마나 스스로도 질리게끔 뭔가를 하거나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 생각했고, 내게 삶은 결국 남은 시간을 어떻게 허비하는지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생각을 했다.(P.218)
<어떤 작위의 세계>는 그렇게 허비한 시간의 기록이다. 그리하여 정영문의 세계는 ‘격렬하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무위의 노력을 펼쳐 보인다. 쉬워 보이는가. 결코 쉽지 않다. 극도의 정신적 집중이 필요한 작업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토록 힘든 작업-격렬하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일-에 매달리는 것일까. 언뜻 보면 세상의 무의미를 중생에게 일깨워주려 노력하는 선지자의 모습이 엿보인다. 의미와 목적에 매달리는 중생들의 욕망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자신의 헛소리로 깨달음을 주려 한다랄까. 하지만 그의 진짜 모습은 조로아스터도, 다다이스트도 아니다. 소설 속 화자의 노력은 오히려 개인의 구도에 가깝다. 그는 개인적 수양을 위해 격렬하게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이를 위한 적절한 방법을 찾아낸다. 바로 궁상이다.
궁상은 무의미에 무의미로 대적하는 저항의 방법이 아닌, 무의미를 견디기 위한 최소한의 개인적 보호막이다.
궁상의 문제 중 하나는 알맞은 정도로, 품위를 잃지 않고 잘 떨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궁상은 일종의 정신적인 행태로 볼 수도 있었는데, 어쩌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자 하면서 기어코 떨어지고자 하는 어떤 정신적 분투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궁상은 가혹하게 권태롭고 무의미한 이 세계에 맞서기보다는 패배를 받아들이며 백기를 흔들면서 속으로 웃는 것으로 볼 수도 있었다. (P.65)
여기서 핵심은 웃음이다. 조롱이고 냉소다. <어떤 작위의 세계> 화자의 무의미해 보이는 270페이지의 기록이 가치 있는 것은 기록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유머 때문이다. 궁상이 섞인 유머는 다음과 같다. (보면 알겠지만 구사하기 어렵다)
멧돼지가 출현하는 것으로 알려진 서울의 어떤 산에 있는 팻말에 적힌 문구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멧돼지와 마주치게 되면 돌멩이를 던지거나 하는 공격적인 행동을 해서도, 등을 보이는 식의, 나약하거나 비굴해 보이는 행동을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었는데 그것들 말고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P.219)
내 옆자리에는 50대쯤 되는, 목이 굵고 짧은, 소위 말하는 레드넥이 앉아 있었는데, 우리는 서로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는 수영복 차림의 글래머러스한 여자가 물기에 젖은 채로 바다에서 나오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표지에 실린 어떤 스포츠 잡지를 이해하기 어려운 어떤 철학책을 보는 것처럼 한동안 집중해서 보다가 반라의 여자를 생각하는 듯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더니 잠이 들어 코를 골았다. (P.254)
어떤가. 궁상의 유머는 이토록 절묘해야 하며, 그래서 떨기가 도통 쉬운게 아니다.
<어떤 작위의 세계>는 텅 빈 공간에 무언가를 채우기 위한 시도가 아니다. 대신 텅 빈 공허함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작가가 전하는 개인적인 생존방법의 하나이다. 마치 데이비드 포스터월러스는가 권태의 상황 속에서 개인의 생각을 통제해야 한다는, 즉 생각 조절을 통해 허무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고 전한 것과 비슷한 층위다. 철저하게 개인적인 차원에서 대응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충고다. 물론 권태의 고통 속에서 행복을 찾기 위해 생각을 조절해야 한다는 데이비드 포스터월러스의 아이디어보다, 정영문의 제안은 훨씬 쉽고 현실적이만, 부단한 노력과 연습이 필요한 건 매한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