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로스 <미국의 목가>
형은 그 전에는 한 번도 ‘왜 모든 게 요 모양 요 꼴일까?’ 하고 물어본 적이 없어. 모든 게 요 모양 요 꼴로 늘 완벽한데 뭐 하러 그런 걸 묻겠어? 왜 모든 게 요 모양 요 꼴일까? 답이 없는 질문이지 (1권-P.114)
필립 로스의 소설 <미국의 목가>는 ‘왜 모든 게 요 모양 요 꼴일까?’란 질문을 몰랐던 한 남자의 이야기다. 스위드 레보브. 그는 ‘존중해야 할 모든 것을 존중하고, 어떤 것에도 저항하지 않고, 절대 자기 불신 때문에 불편해하지 않고, 절대 강박의 그물에 걸리거나 무능에 시달리거나 원한 때문에 독이 쌓이거나 분노 때문에 제정신이 아닐 필요가 없(1권-P.52)’던 남자였다. 그러니까 ‘왜 모든 게 요 모양 요 꼴일까’란 질문을 몰랐던 게 스위드 잘못은 아녔다. 단지 그의 ‘인생이라는 것이 털실 꾸러미처럼 술술 풀렸(1권-P.52)’을 뿐. 하지만 그 질문을 몰랐단 이유로 스위드가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다.
스위드가 겪게 된, 감내할 수 없는 비극의 출발은 첫 아이의 탄생이다. 아이의 출생은 형용하기 힘든 기쁨의 순간이다. 아이는 신비롭고 귀엽다. 아이는 행복에 관한 패러다임을 바꿔놓기에, 부모는 차원이 다른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동시에 부담도 생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란 질문은 신생아를 키워 본 사람에겐 논쟁거리가 아니다. 당연히 닭이 먼저다. 닭 없이 달걀 혼자 생존할 수 없다. 그만큼 조그만 생명체는 귀여운 만큼 무기력하다. 아이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존재. 부모는 아이의 신이 된다. 아이가 신생아 단계를 벗어난 이후에도 부모는 신으로 군림한다. 세상의 온갖 위협에서 아이를 보호함과 동시에, 규칙과 규율을 부여한다. 신이 된 부모는 아이의 세상을 완전히 통제하고, 아이는 부모에게 절대복종한다.
‘아이를 보호하고 또 보호하지만, 아이는 보호가 불가능하다. 아이를 보호하지 않는다 해도 견딜 수 없고, 보호한다 해도 견딜 수 없다. 다 견딜 수 없다. 아이의 무시무시한 자율성의 끔찍함. 세상에서 최악의 것이 그의 자식을 데려갔다.’ (2권-P.65)
문제는 부모가 임시직 신이라는 점. 언제까지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아이의 무시무시한 자율성과 함께 부모에게 부여된 신의 권위는 취소된다. 허나 아이의 자율성이 언제 완성되는지 아무도 모른다. 때문에 부모가 신의 지위에서 인간으로 전락하는 순간은 갑작스레 찾아온다. (우리의 부족한 인지 능력이 아이의 서서한 변화를 제대로 감지 못한 것일 수도.) 인식은 현실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이때 갈등이 발생한다. 자율성을 지닌 두 존재의 충돌. 자율성을 지닌 아이 앞에서, 이제 부모의 통제력은 상실된다. 부모의 질서 밖에 아이의 세상이 자리 잡는다. 스위드의 혼란도 여기서 시작됐다.
‘왜 모든 게 요 모양 요 꼴일까?’는 답이 없는 질문이다. 살면서 그 질문을 날렸던 사람이라면, 세상엔 답 없는 질문이 많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스위드에겐 그런 경험이 없다. 그리하여 자신의 삶을 지배하던 질서의 논리가 아이에게 적용되지 않자, 극도의 혼란에 빠진다. ‘완벽하게 정상적인 아이에게 어떻게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난 걸까’(2권-P.65) 답 없는 질문의 답을 끊임없이 찾아 나서며, 스위드의 비극은 본격화된다.
나는 죽는 순간까지 스위드를 당혹스럽게 했을 바로 그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미국 독립 전쟁 이후로 현지 주민의 일상적 삶을 한 번도 침범한 적 없는 역사가 이 은둔한 듯한 구릉지에까지 구불구불 기어들어와, 믿을 수 없게도 그 모든 예측 가능한 예측 불가능성으로 시모어 레보브(스위드)의 질서 정연한 가족 안에 무질서하게 난입했다. (1권-P.141)
스위드의 딸, 메리는 베트남 반전 운동에 사로잡혔다. 공산주의 운동에 매료됐으며, 급기야 마을 우체국을 폭파하는 테러범이 됐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스위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질문을 던진다. ‘왜 모든 게 요 모양 요 꼴일까?’ 하지만 바로 그게 필립 로스가 자신의 모든 소설을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삶의 이면에 숨은 무질서한 어둠의 힘이다. 인과론적으로 해석 불가능한, 동시에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나아가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수 있는 파괴력까지. 바로 이 모든 힘의 잠재력이 자식에게 담겨있다. 필립 로스가 보여주는 스위드의 갑작스러운 비극이 너무 리얼해서 선연한 이유다.
딸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했다. 어쩌면 이것이 그 아이가 하고 싶었던 유일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질서는 하찮은 것이다. 그는 대부분이 질서이고 아주 작은 부분만 무질서인 줄 알았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한 것이었다. 그는 환상을 만들었는데, 메리가 그를 위해 그 환상을 해체해주었다. (2권-P.281)
스위드 레보브는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사실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비극을 통해 진실을 깨달았다. ‘왜 모든 게 요 모양 요 꼴일까?’란 질문은 답이 없으며, 그 어떤 것도 한순간 ‘요 모양 요 꼴’이 될 수 있단 사실을. 자식도 절대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여전히 스위드식 착각에 빠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날리는 필립 로스의 끔찍한 경고다.
어른들이 늘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내 마음대로 되는 자식 없다고. 스위드식 비극을 되풀이해선 안 되겠다. 언젠가 신의 자리에서 추락할 순간을 늘 깨어있는 정신으로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나아가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아이의 세상 이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연습해야 한다. 그게 갑작스럽게 반항하는 자식에게 상처받지 않을 유일한 방법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