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보니것 <고양이 요람>
등신처럼 무능했던 아내의 새 팀장은 자신의 모자란 능력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오직 입으로 온갖 아이디어를 쏟아냈고, 아내는 몹시 괴로워했다. 아내의 단순한 뒷수습으로 개선될 상황이 아녔다. 그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3자 적 시선으로 거리를 두고 상황을 바라보라’는 것밖에 없었다. 아내의 성취감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이 말은 적어도 비현실적 지시를 말로만 쏟아내는 팀장을 조롱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임시방편적 해결책이지만 자신의 한계를 모르는, 무능력하지만 한편으로는 욕심 많은 상사와 일할 때는 ‘줌아웃’이 효과가 있다.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여 치열하게 문제를 해결할 때는 자신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처했는지 보이지 않고, 그리하여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게 되는데, 사실 그 문제가 애초에 해결이 불가능한 것이었다면, 노력의 결말은 정해져 있다. 극한의 고통. 그때 줌아웃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게 해준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을 알고 나면,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덜 괴로운 데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조롱하며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다. 그게 바로 줌아웃 효과다. 물론 문제는 줌아웃을 어떻게 하느냐다.
아내는 사실 휴머니스트라, 어지간한 등신도 사랑하는 편이고, 현재의 상황은 좀 특수하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커트 보네거트는 좀 다르다. 도처에서 인간 종이 보여주는 등신 같은 행동들에 괴로움을 멈추지 못하던 그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커트 보네거트가 종종 구사하는 기술이 바로 줌아웃이다. 그는 방대한 스케일의 상상력으로 종종 인간 종을 3자 적 시선에서 바라보고 조롱한다. <제5도살장>에선 트랄팔마도어인(과거-현재-미래를 한눈에 보는)이 등장하고, <갈라파고스>에선 백만 년 후, 새롭게 진화한 인간 종(뇌가 사라진다)을 그려낸다. 그리고 <고양이 요람>에선 산 로렌조 공화국과 보코논교라는 가상의 나라와 종교를 탄생시킨다.
우화의 방식이다. 가상의 국가가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며, 인간 종이 함께 모여 사는 사회를 부담 없이 풍자하고 조롱한다. 산 로렌조 공화국. 보코논교. 그리고 아이스-9이 소설 속 세 개의 키워드다. 산 로렌조 공화국은 전형적인 독재 국가다. 그 국가를 지탱하는 두 개의 힘. 바로 보코논교로 대표되는 종교와 아이스-9으로 상징되는 과학이다. 착각과 오류, 오만과 편견, 실수와 오해 위에서 사는 인간 종은 태생적으로 멍청하다. 헛소리에 쉽게 넘어가는 사고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그래서 힘을 발휘하는 게 사이비 종교다. 보코논교의 성경에 해당하는 칼립소를 보자.
나는 모든 것들이
뭔가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이길 바랐지.
그래서 우리가 서로에게 긴장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나는 그 모두가 빈틈없이 아귀가 맞도록
거짓말들을 지어냈고
그리하여 나는 이 슬픈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었네 (P.120)
그래도 보코논교는 범죄나 파괴를 조장하지 않는 범위에서는 적어도 위안을 준다. 거짓말에 잘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사고 구조는, 어떤 측면에서는 축복일 수 있다. ‘인생은 언제나 그랬듯 짧고 잔인하고 하잘 것 없다는 것, 그것이 진실이었소 (P.161)’라는 끔찍한 진실을 굳이 알 필요가 있겠는가. 멍청함은 그 자체로만 보면 측은의 영역이지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문제는 멍청함을 모르고 세상에 영향력을 발휘할 때 발생한다. 이성을 무기로 탐욕을 드러낼 때 멍청함은 죄악이 된다. 탐욕은 종종 ‘과학과 이성’이란 이름으로 발현되며, 이때 맹목적인 이성은 인류 멸망의 최대 위협이 된다.
“우리를 비롯한 이 나라의 극소수 회사들은 지식을 늘린 대가로, 그 외에 다른 어떤 목적도 없는 일을 하는 대가로 사람들에게 봉급을 줘요.”
“제너럴 단조 주조 회사는 참 관대하군요.”
“관대하달 건 없소. 새로운 지식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값진 상품이니까. 써먹을 진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는 더 부유해 지는 것이오.” (P.44)
결국 보코논교로 독재를 숨기던 산 로렌조 공화국은 과학으로 탄생한 아이스-9(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화학 물질) 때문에 멸망한다. 너무 극단적인가. 이미 2차 세계 대전에 참여해 드레스덴 폭격을 경험한 커트 보네거트 입장에선 인류가 맹목적인 탐욕으로 멸망할지 모른다는 설정은 지극히 현실적이었을지 모른다. 소설 속 아이스-9은 실수로 산 로렌조 공화국을 망하게 했지만, 2차 대전 당시 인류가 벌였던 핵전쟁은 지극히 합리적인 계획 아래 진행되지 않았던가. 커트 보네거트를 괴롭혔던 건 단순한 인간의 멍청함이 아닌, 언제 지구를 한 방에 날려버릴지 모를, 인간의 탐욕스러운 멍청함이었다.
커트 보네거트가 데려간 줌 아웃 여행을 마치고 나면, 지금 내 주변의 멍청이들이 참 소중하게 보인다. 어찌 보면 인류 자체가 멍청하게 탄생했고, 인류의 후손인 나와 내 주변인들이 멍청한 건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 아니겠는가. 그래도 인류는 끊임없는 교육으로 그 멍청함을 시스템으로 보완하려 노력하고 있다. 지구가 아직까지 망하지 않고 있는 건, 끊임없이 줌아웃을 통해 우리가 처한 현실을 보여주는 소설가들 때문이 아닐까.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을 읽는 건 정신 나간 조직에서 정신 꽉 부여잡고 견디기 위한 최고의 방법임을, 다시 한번 새 팀장의 멍청한 욕심으로 괴로워하는 아내에게 상기시켜줘야겠다.
대통령들, 상원의원들, 장군들, 이런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데 책은 써서 무얼 하나 하고 나는 걱정했습니다만, 대학에서 교편을 잡아보니, 아주 좋은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즉 장성이나 상원의원, 대통령이 되기 전에 사람들을 잡아서 그들의 두뇌를 인간성으로 중독시키려는 것입니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라고 격려하는 것이지요. -뉴욕타임스 인터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