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fe with Fugue Nov 20. 2020

펭수와 광기의 역사




나랑 아무리 극단적으로 다른 선호나 취향일지라도 각 사람의 백그라운드를 고려하면 공감은 못해도 대강 왜 그런지 이해는 가기 마련인데, 펭수는 진짜 뭐가 재밌고 좋은지 도무지 모르겠다.

이토록 범국민적 대세인 것을 유달리 나만 공감하거나 이해하지 못할 때, 이쯤 되면 펭수 좋아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이상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늘 실패하지만)어느새 펭수를 좋아해보려 노력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까지 한다. 현대 사회란 이렇게 촘촘한 상호감시와 검열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펭수 이야기는 그냥 농담이지만, 이게 펭수가 좋고 싫고의 정도의 차원이 아니라 성별, 나이, 성적 지향성, 인종, (정신병리적)정상과 비정상의 차원으로 나아가면 문제가 된다. 펭수 싫어한다고 사는 데 지장 없지만 그 밖의 것들은 삶의 영위에 대한 가능성 자체를 제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짐멜에 따르면 현실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물을 수용하는 다양한 형식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즉 현실이란 결국 어떤 유물론적 사건에 대한 감각적 재구성의 산물이며, 사람마다 인지도식에 차이가 있으므로, 가치규범이나 당위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현상에 대해서도 각기 다른 현실인식을 갖게 된다.

이 현실인식이 '평균'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 삶의 영위에 지장이 있는 경우, 현실검증력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보며 특정 진단기준에 따라 질병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 '평균'을 규정하는 기준이 문제가 된다. 평균이라는 개념은 곧 일련의 분류체계, 정상과 비정상을 구별하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단지 대부분의 사람들의 표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정상으로 보고 권리를 제한하는 것이 정당한가? 이런 의문을 가장 거시적인 층위에서 제기한 학자가 바로 미셸 푸코이다. 현대인들의 관념의 근간인 소위 '근대성'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푸코의 분석은 '광기'에서 출발해 사회 전체를 조망한다. 푸코는 근대성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산물이며 우연히 발명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서구적 근대성, 곧 과학주의와 합리적 이성을 표준으로 하여 기준 밖의 사람들을 반사회적 타자로 분류하는 권력의 권위 역시 자생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것이다.

결국 우리가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라고 믿는 현실인식의 기준, 나아가 근대성 그 자체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규제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성 참정권이 없고 동성애가 질병으로 분류되던 시절이라고 뭐 전근대였는가? 심지어 정상이라 판단되는 범위 안에서조차 인싸와 아싸의 구분은 타자화의 불안을 야기하며, 스스로 자족적 아싸를 지향한다는 사람들도 결국은 대중과 차별화된 라이프스타일이나 취향 따위로 실존을 구성해 계급적 우위에 서고 싶을 뿐인 것이다. 이것이 정말 합리적이고 정당한가?

어쨌든 현대사회에 태어나 살아가게 된 팔자인 이상 현실검증력과 사회성,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방식은 여러모로 삶을 성공적으로 영위해 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정신적으로 고양되고 문화적인 사람은 자족적인 '개인법칙'에 따라 꽤나 완성도 높은 삶을 살아갈 확률이 높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현재의 역사적 맥락이 현재 나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적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소수자를 혐오하고 차별한다. 남학생들은 '게이'라는 단어를 모욕으로 사용하며, 일련의 범죄사태 이후 '조현병'이라는 단어도 경멸적 욕설이 되었다. 소수자 배제하고 정상범주 사람들끼리 안온하게 살아가는 사회가 과연 '근대적 기준에서 합리적인' 사회인가?

동성애나 장애인에 대한 레비나스적 환대, 무조건적인 정치적 올바름 추구, 적극적 옹호 따위를 펼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내 판단기준이 과연 보편타당하게 옳은 것인지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이따금은 남들이 아니라 내가 이상한 건 아닌지 성찰해 보자는 것이다. 내가 꿈꾸는 좋은 사회란 타자에 대한 무한의 환대와 공동선이 판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소수자들이 그 소수성으로 인해 삶의 가능성을 제한당하지 않고, 그저 '펭수 싫어하는 애'정도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이다. 내 삶이 성공적이고 행복하다고 느껴질수록, 실체도 없는 '감사'따위 할 게 아니라 그 정치적이고 권력적인 토대를 돌아보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펭수는 여전히 영원히 싫다.

작가의 이전글 토끼와 거북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