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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with Fugue Nov 20. 2020

토끼와 거북이

어릴 때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싫어했다. 대체 어떤 미친 거북이가 토끼가 중간에 멈춰서 잘 것을 기대하며 꾸준히 육지를 처 걷는가? 수생인 거북이와 육지동물 토끼를 뭍에서 경주시킨 것부터가 애초에 불공정한 게임인데, "성실히 끈기 있게 노력하면 천재를 이길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되고 마치 교훈마냥 소비되는 것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딴 걸 의심 없이 옳다고 믿도록 주입하는 교육방식 자체도 싫었고.

개인의 태도나 노력 여부, 인격에서 승패의 실마리를 찾는 것은 대부분 정당하지 않다. 기본적 귀인 오류다. 꾸준함이 미덕이 아니라는 소리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환경적으로 상황적으로 정상적인 경쟁이 성립될 수 없다면 미덕 따위가 게임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노력이 결과에 작용할 여지가 전혀 없는데 경쟁을 강요당하고, 애초부터 어쩔 수 없는 패배에 노력 부족 따위의 평가를 받는다면, 일단 어처구니가 없어야 정상이다. 그걸 또 좋다고 "그래 한번 해보자. 열심히 하면 될 거야"라며 받아들이는 거북이의 무신경하고 무감각한 태도를 나는 그래서 혐오한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거북이처럼 그저 순응하며 긍정적으로 성실히 살아가는 사회는, 구조적 부조리가 발견되고 분노가 일어나고 담론과 연대가 형성되고 진보할 여지가 없는 죽은 사회다. 그래서 나는 소위 긍정충을 양산하는 사회 분위기를 건강하지 못한 것으로 본다. 내가 거북인데 육상에서 토끼랑 같이 뛰라고 하면 일단은 화가 나고, 어이가 없어야 정상이지,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간 될 거야"라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오히려 체념이나 패배주의보다 더 나쁘다. 그건 그냥 생각이 없고, 개인이나 사회에 대해 아무런 윤리적 감수성도 없는 반응이기 때문이다.

통념이 꼭 보편타당해서 통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중세 유럽의 기득권층은 종교 도그마로 사람들의 정신을 규율해 권력의 권위를 유지했다. 현대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규율적 권력만 권력일까? 당신이 살아가며 습득하고 내면화한 내적 규범들, '취향' 혹은 '문화'라고 착각하는 것들이 실은 교묘히 은폐된 권력의 반영이지는 않을까? 쉽게 말해서, 내가 늘 긍정적으로 순응하며 성실히 살아가면 어떤 놈들이 이득을 볼까? 긍정마인드란 그런 것이다. 그것은 불공평을 은폐하고, 사람들을 무감각하게 만든다. 감각의 마비는 곧 정치의 마비, 혁명과 해방의 마비, 모든 역량과 가능성의 마비다. 민주주의의 치명적인 오류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감각의 마비로써 유지되는 질서, 침묵으로 공고해지는 경계.


평범해도 괜찮아? 물론 괜찮을 수 있지만 과연 당신이 생각하는 '평범'이란 무엇인가? 나태하고 안일하게 모든 것을 합리화하고 타인의 고통과 부조리에 눈 돌리며 살아가는 삶을 평범이라 일컫는다면 평범은 죄다. 그리고 죄스럽게 사는 것은 당연히 전혀 괜찮지 않다. 무한 긍정과 순응을 강요하며 상황이 아닌 니 마인드를 바꾸라는 사기꾼들의 공염불이 열 받기는커녕 삶에 위로가 되는가? 먹방 펭수 인플루언서 유튜브 한심한 힐링책이나 보면서 생각 없이 사니까 아무런 의문도 분노도 없는 것이다. 그 생각 없음의 원인을 당신들의 태도나 노력 여부에 귀인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오류가 아니냐고? 단언컨대 아니다.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을 하지 않는 게으름,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비유처럼, 그것은 가장 유서 깊은 죄악 중 하나다.


거북이로 태어났다면 토끼와의 경주를 종용하고 꾸준히 걸을 것만을 강요하는 세상의 질서에 분노해야 한다. 거들먹거리는 토끼의 멱살을 쥐고 물속에 처박은 뒤 다시 경주해보자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멈출 수 있고 멈춰도 되는 삶은 특권이다. 토끼씩이나 되니까 멈출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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