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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with Fugue Nov 20. 2020

갈등과 진보


앞의 동물 사랑 이야기로부터 논의를 확장해보자. 성숙한 사회라는 것의 준거는 무엇인가. 과연 무엇을 지향해야만 진보라 일컬을  있을 것인가. 어떤 가치가 지상가치인가. 합의된 가치는 반드시 옳은가.

코로나19 사태로 공동체의 연대가 중요하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공동체주의가 다시금 힘을 얻었지만, 통념으로 결속하여 기존 질서를 강화하고, 약자와 소수자를  앞에서 치워 갈등의 촉발을 가로막는 것은 연대가 아니라 전체주의다. 민주주의를 잘못 배운 사람들은 갈등 없이 최대한 빠르게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민주적 의사결정이라고 믿는데, 그런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전체주의적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도달점 없는 논쟁, 봉합될  없는 갈등, 끝없는 불편함들이 도처에서 아무 제약 없이 마음껏 발화하고 폭발하는 사회에서만 유용한 정치적 체제일  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여기고 쉽게 사용하지만, 자유와 민주주의의 접합은 태생적으로 불협이며 갈등적이라는 이야기다. 따라서 모든 정치 담론의 시작은 당파가 아닌 이러한 '정치적인 ', 요컨대 갈등을 바라보고 다루는 방식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가 갈등을 겪고 있다는 것은 진보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갈등이 극으로 치달아 망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한국 사회가 그 정도로 안전망이 빈약하고 기반이 취약해 보이지는 않기에 나는 거의 모든 갈등으로부터 희망을 본다. 다시 한번 동물로 예를 들어볼까. 개장수들의 송사를 이겨내고 동물애호가들은 개공장과 고양이농장을 박살내기 시작했으며, 생각 없는 언론이 길고양이를 살인진드기 매개체로 몰아갈 때에도 진정 의미의 팩트로써 그것을 번복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10년, 20년 전만 해도 동물에게 감정이 있다는 사실조차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동물을 존중하고 생명을 소중히 한다는 것이 별로 세련된 태도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갈등을 통해 우리 주변의 동물들에 대한 인식이 그저 '가축'에서 '공존하는 소중한 생명'으로 변화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치적 힘이라는 것의 구체적인 모습이. 다른 예로중세 사람들이 만약 여자가 정장 입고 출근하는 것을 보았다면 불편했을 테지만 지금 그것은 전혀 이상한 모습이 아니다. 여자의 사회활동에 관한 소기의 불편함은 "여자라고 왜 다르지? 여자는 왜 집안일만 해야 하는 걸까? 남자보다 여자가 못한 게 뭔데?"라는 회의와 의문으로부터 정신적인 층위에서 먼저 해체되기 시작했고, 그것이 직접적인 사회운동으로 확장되면서 기존의 통념을 아예 물리적으로 구축해 버렸다많은 사람이 피 흘렸다. 그러나 그 갈등을 감내하지 않고 그냥 "예.. 여자라면 마땅히 그래야죠 뭐.."하며 순응해 버렸다면 어땠을까당시에도 물론 '회의에 회의적인' 사람들은 있었고, 또 그게 다수였다. 뒷짐 지고 혀 차는 다수의 논리에 따라 모든 갈등을 소거해 버렸다면 지금 과연 편의점에서 생리대는 마음 놓고 살 수 있을까? 그러나 여자가 운전대 잡는 것조차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공장형 사육에 반대하면 채식주의자로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고, 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면 너 게이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커먼센스가 벼ᅪ하고 교육이 바뀌어도, 이미 굳을대로 굳은 사람들의 머릿속은 쉽사리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불편러'들은 자기가 느끼는 그 불편함의 근원, 그게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과연 당위가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냥 불편을 일으킨 대상을 심플하게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해서 배제해 버려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다수에 속해 있고 다수와 같은 가치체계와 선호를 갖고 있으면 '정상'이고, '비정상'인 놈들을 비난할 권리가 생긴다는 그 단순하고 난폭한 믿음들을 어떻게 해체할 수 있을까소수자에 대한, 약자에 대한 무시와 조롱, 혐오가 당연시되고 있고 심지어는 미덕으로 여겨지기까지 하는게 과연 정상일까? 다수가 통째로 돌아 버린 건 아니고? 정말 사소한 것, 예를 들면 남의 식습관이나 옷차림에서까지 갈등과 불편함을 느끼는 그 예민함, 보수적 가치에 대한 광신도적 복종, 취향도 가치관도 사상도 없이 다수의 논리만을 좇는 사람들. 그 거대한 하이어라키, 눈먼 개인들, 소거된 주체, 마비된 국가기능, 획일적 집단주의,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서 "여러분, 갈등을 잠재웁시다. 순응하십시오"라는 투의 연설을 해도 되는 나라, 대한민국. 이 나라에서 소위 사회화라는 것은 개인의 이기심과 자연주의를 극복하고 공동체의 윤리와 연대의식을 학습하는 그런 과정이 아니라, 아무 말 못 하고 기성세대의 통념을 주입받는 정신적 학대에 가깝다그렇게 잘 자라서 '정상적인' 성인이 된 사람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가관이다모든 갈등과 통속적 가치에 대한 위협들에 알러지 반응을 보이며, 그것에 잘 부역하는 것을 벼슬마냥 여기는 무식하고 무례한 노예들, 맨날 나라꼴 운운하지만 정말로 나라가 망한다면 이들 때문일 것이다. 낡은 가치에 예속된 자들이 기득권층마냥 행세하는 것을 보면 우습기 짝이 없다. 당신이 전에 알던 세상은 순식간에 송두리째 뒤집어질 수 있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오만한 기준과 잣대, 편협한 편견들을 한 개인이 감내하고 이겨내며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이성적이고 정신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한국에서의 사회생활은 그래서 매 순간이 투쟁이다. 오늘도 첨예한 사회갈등을 제조하며 통념에 찌든 사람들의 머릿속을 전복하기 위해 애쓰는 그 모든 유의미한 발걸음 하나하나에 진심어린 찬사를. 편하게 사는 놈들은 다 공범이다.  삶을 둘러싼 세상이 어느 순간 편안하게 느껴진다면  번쯤 자문해 보아야 한다. 무엇을 딛고  편안함인가, 과연 나는 공범인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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