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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with Fugue Nov 20. 2020

인문학 페티쉬즘


공산품은 완성된 형태로 매장에 진열되어 있고,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소비자에게 보여지지 않는다. 보여진다고 하면 그것은 마케팅을 위한 것이며 극적으로 가공된 장면일 확률이 높다. 그래서 모든 공산품은 필연적으로 그 내용과 과정 일체를 소외시킨다. 극단적 예지만 어떤 노동자가 물건을 만들다 손가락이 잘렸고 그로 인해 생계를 잇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들, 공산품이 최종적으로 소비되는 장소에서 그러한 슬픈 이야기는 절대 오가지 않는다. 리테일러나 소비자가 그런 과정을 자각할 이유도 사실은 없다. 가장 좌파적인 사람이라도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며 계급적 사유나 정치적인 것을 연역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이다. 대중화란 결국 무언가가 슈퍼마켓에 진열된 공산품처럼 된다는 의미다. 따라서 모든 대중화되는 것들은 꼭 얼만큼의 핵심을 누락하거나 핵심의 변질을 수반한다. 공산품이야 뭐 그러한 경제성과 효율성에 그 효용이 있는 것이니 그렇다 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것들도 공산품처럼 되어간다면 문제가 없지는 않겠다. 소위 인문학 열풍이 그렇다. 그것은 인문학의 유행이 아니라 시장에서 거래가능한 경제재의 형태로 환원된 '인문학적으로 보이는 무엇'의 유행이며, 이러한 인문학의 사물화로 인해 소외되는 것은 인문학의 근간, 인문학적 사유의 과정, 요컨대 인간학적 이해이다. 인간학적 이해가 빠진 인문학은 이미 인문학이 아니지 않은가. 설사 그렇게 해서 인문학이 유행하고 전국민이 인문학 덕후가 된다고 한들, 그것은 인문학의 몰락에 가깝지 부흥은 아닐 것이다. 이런 걸 아감벤의 세속화 개념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은 권력의 중심만 교묘히 옮겨간 환속화이자 일종의 페티쉬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대형서점에 산더미처럼 쌓인 책들에 과연 주체를 자유롭게 하는 정치적 힘 따위가 있을까? 이제 사람들은 상품을 숭배하듯 인문학도 숭배하게 되지 않았는가? 숭배는 사유(의 촉발 자체)를 제한하고, 사유의 가능성이 사라진 세상에는 예속된 군중만 남을 뿐, 어떠한 진보나 혁명의 가능성조차도 없게 된다. 지금 기존의 텍스트와 사상들은 유튜브와 인문학 불쏘시개들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으며, 물신숭배와 사물화, 부품화된 인간에 대한 사유는 낡고 도태된 퇴물 취급을 받고 있다. 허나 단언컨대 넓고 얕은 지식으로는 지적 대화를 할 수 없으며, 언어의 온도만 좇다 보면 언어의 밀도는 갈수록 낮아질 것이고, 미움받을 용기만 중시하니 잘못된 세상에 분노하고 연대할 용기는 퇴색되는 것이다. 마치 거대한 장작 편집숍을 연상케 하는 대형 서점의 매대, 그 앞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한참 둘러보고 있자니 문득 들었던 씁쓸한 생각이다. 정작 사려던 책들은 모두 절판돼서 구경도 못 하였으니.


사진과 본문은 관계가 없... 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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