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와 이론에만 의존해 색채와 조형을 방기한 현대미술은 과연 내용적으로 진화한 새로운 미술일까, 아니면 지식인 상징자본으로 전락한 정치적 미술일까? 현재성 있는 담론이다. 내 생각은 일단 회화는 회화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 악기로 연주한 바로크 음악을 인정할 수 없듯이, 관념으로 도피하는 회화는 아무런 힘도 없다고 생각한다.
주저 <감각의 논리>에서 들뢰즈는, 베이컨의 기획은 감각을 이야기와 은유, 그러니까 모든 서술적인 것들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베이컨은 형상이 동시대의 토포스에 고착되는 것을 막고자 얼굴과 신체의 형태를 일그러뜨린다. 베이컨의 회화에는 재현할 모델도 이야기도 없다. 캔버스 위에 옮겨진 것은 그저 감각이다. 베이컨의 업적은 회화라는 양식을 통해 감각, 무엇보다 고통의 전이를 보편적 차원에서 가능케 했다는 부분이다. 형상을 아예 없앤 추상 회화는 이 기능을 해내지 못했고, 예술의 또 다른 효용에 집중하고 천착하기 시작했다. 이것까지 이야기하면 글이 딴 데로 새니까 후술하기로 하고.
이러한 현대 회화를 어떻게 감상해야 할까? 사람들은 누구나 미술 작품을 나름의 언어로 해석하려고 한다. 해석하고자 하는 욕구는 본능이다. 초보적 감상자라도 순간의 시각적 자극만으로 만족하고 감상을 끝내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랬다면 그건 작품의 형식이 수용자에게 충분히 유의미하거나 아름답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는 방증일 것이다. 아무튼 현대미술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미술관에 가서 난해한 작품을 바라보며, 이건 뭘 그린 걸까, 하며 익숙한 구상적 형태를 찾아내려고 한다거나,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작가의 생애에 기반한 창작 의도를 유추해 본다거나, 하다못해 가격표라도 들여다본다. 다들 SNS에 진지한 인상비평을 남기기도 하고 나무위키도 한번 찾아보고 그런다. 이해할 수 없는 감각적 자극을 미학적으로 해명하고 명료하게 기술하고자 하는 습성은 인간적 본능이다.
딜레탕트를 양산하는 고등교육, 그러니까 평균적으로 사람들이 다룰 수 있는 기술적 언어의 폭과 범위가 확대되며 일단 사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모두 제 나름의 비평적 주관을 갖게 되었다. 한 작품에 대해 감상자의 수만큼 다른 비평이 존재한다. 대중화와 다양성의 차원에서 이러한 풍토가 장려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감상 방법은 예술을 죽인다. 각자의 고정관념으로 미학적, 윤리적 판단을 선행해 놓고 그 프레임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평은 자기 경험과 통념, 작가의 생애와 역사, 시대상 등 작품 외적인 요소들만을 총동원하여 수행하는 귀납적 기술이다. 작품 그 자체, 그 개별적 총체성만으로 뭔가를 해내지 못하고, 작품의 기능은 상투적 이야기의 삽화적 역할에 그친다. 결국 보편주의, 본질주의, 그리고 이데올로기로 귀결된다. 미학이 본래 정치적이라는 랑시에르의 말은 그래서 옳다.
한편 좀 더 훈련된 사람들은 대개 해석학적 방법론을 적용한다. 작품을 텍스트로 간주하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풀어내려고 한다. 그들은 적어도 작품의 총체성에 좀 더 관심이 있다. 인상비평보다는 더 객관적인 비평을 시도한다. 이들에게 감상이란 감각적 지각의 언어화, 그 사유와 기술 과정을 의미하며 목표는 한 작품을 창발하는 모든 개별 요소들을 속속들이 분석하여 기술하고 그 상호작용을 설명해내는 것이다. 여기선 이데올로기보다는 에피스테메, 소위 담론의 질서가 중요하다.
마침내 한 작품을 구성하는 물질적, 역사적, 사회심리학적 및 그 외 모든 요소들을 빠짐 없이 속속들이 기술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자. 그 결과 감상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아무것도 없다. 어휘와 개념을 다루는 스킬이 향상되고 좀 더 학자적인 문장을 구사할 수 있게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건 그냥 작품을 동력원으로 소모해 버린 것에 불과하다. 작품 감상을 통한 유의미한 주관적 경험, 주체의 변혁, 고양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작품은 고정되어 있고, 짜맞춰 서술해낸 공허한 의미들만 부유할 뿐이다.
게다가 작품에 대한 총체적으로 완벽한 기술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가용한 모든 자원을 동원해 한 권의 책을 써내도 뭔가 부족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감각적 지각은 감각 그 자체와 완전히 대응되지 못하며, 널리 오용되는 말이지만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세상에는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이 있으며, 침묵할 필요까지야 없겠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예술이다. 언어적 기술의 한계 지점에서 예술 작품의 힘이 드러난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어떤 그림을 바라보며 갖게 되는 공통감, 그것이 예술 작품의 보편성이다. 학문과 언어의 힘을 빌어 작품을 한낱 메타포로 전락시키는 것, 심지어 그 메타포가 작품 감상에 선입견으로 작용해 시야를 가려버리는 것, 이런 걸 객관적인 비평이라고 하는데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순수한 경탄이나 유치한 인상비평이 더 효용이 클 수도 있는 것이다.
말하지말고 그냥 느껴봐! 대단히 멍청한 소리처럼 들리지만 이게 차라리 맞는 접근방법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근데 그냥 피상적으로 느끼지 말고 정말 섬세하게 집중해서 느끼고 또 느끼고 느껴야 한다. 내가 느끼고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되지 않을 만큼 몰입하여 느끼다보면 작품이 품고 있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어슴푸레 밝혀질(enlighten)지도 모른다. 예술 감상이 고상한 체 하는 허식질에 그쳐서는 안된다. 그건 규범에 굴복한 왜소한 인간의 태도이다. 수용자에게 그런 비굴한 태도, 강제적 몰입, 억지 집중을 강요하는 예술가들도 가짜다. 마음을 다해 바라보고 귀를 기울여야 조금씩 드러나는 무언가를 느끼는 것, 접촉과 접속의 체험이 없이 뭔가를 감상했다고 말한다면 그건 반쪽 짜리다.
정신적 고양, 인격의 고귀화라는 목적론으로 뭔가를 감상하는게 아니다. 그것은 칸트적인 방식이며 예술의 가능성을 크게 제약한다. 목적의식 없이 그저 감상하다 보면 반드시 변화하는 것들이 있다. 사소한 변화들로부터 나아가 내 삶의 흐름이 변화하고 새로운 판단과 가치관이 창출된다. 그것이 짐멜이 말하는 개인법칙의 본의다. 예술가의 형식적 사유가 화폭에 옮겨져 그것을 감상하는 개인의 삶의 미학적 자기인식을 변화시킨다. 사유의 형식이 변화하면 윤리적 판단도 변화하고, 앞서 말한 공통감으로 인해 정치적인 힘(정치적이라는 말과 정치적 힘이 있다는 말의 차이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을 갖게 된다. 작품이라는 닫힌 세계로부터 창출된 무엇이 내 삶으로, 나아가 보편으로, 세계로 연역되고 확장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술 작품이 가진 힘, 기술적 내용 없이도 그 형식만으로 창출될 수 있는 혁명적 에너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