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홍콩 바젤에서, <관계항>. 필자가 직접 찍은 사진임.
요즘 SNS에 이우환 좋아한다는 사람들 대폭 많아졌길래 한번 두서 없이 써본다. 뭘 알고들 좋아하는가. 나는 잘 모른다. 그래서 별로 좋지도 싫지도 않다. 흰 캔버스나 백자에 프린팅되면 디자인적으로 예쁘다. 단지 그뿐인가. 디자인 너머 예술로서의 이우환은 어떤 의미인가. 알아보자.
널리 알려져 있듯, 이우환의 작품세계는 철학, 특히 후설과 하이데거,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우환은 자기 작업을 창작, 창조라 표현하지 않고 제작 또는 제시라고 표현하는데, 즉 그의 작품은 어떤 사물을 그저 어딘가에 가져다 놓는 것, 즉 물성의 '제시'로부터 출발한다. 작법이나 형식이 아닌 물성 자체에 집중하자는 의미로, 이우환은 운동 모노하(物派)를 창시한다. 모노하의 '모노'는 글자 그대로 물체(物)이다.
즉 모노하의 기본 정신은 예술 창작이라는 개념의 뿌리 깊은 모더니즘을 부정하는 것이다. 작가가 주체적으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 자체를 거부한다. 모노하 작가란 제시자, 정확히는 재-제시자이다. <관계항>의 바위가 원래대로 산이나 황야에 있다면 우리의 의식을 집중시켜 어떤 지각 경험을 매개할 수 없기에, 예술가는 그것을 어떤 '장소'로 옮겨놓는다. 그렇게 사물을 재-제시함으로써 밝히고자 하는 것은 존재 자체가 아닌 존재를 둘러싼 세계-장소-와의 어떤 '관계'이다. 따라서 이우환의 회화는 구상도 추상도 아닌 제3의 회화가 된다. 회화는 점으로부터 또는 선으로부터, 세계와 존재의 관계, 조응, 공명을 매개하는 '사물'이다.
따라서 이우환의 작업은 늘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한다. 재-제시 이상의 행위는 불필요하다고 본다. 그린다는 행위 자체에 정신적 의미를 부여하는 여타 한국 단색화와는 전혀 다른 장르인 이유이다. 이우환은 예술 작품의 총체성이나 완결성을 부정한다. 작품은 관계와 만남의 매개이므로 사람마다, 장소와 시공간에 따라 작품의 의미가 다르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하이데거의 '현존재'개념이 읽힌다. 세계 속에서 관계맺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존재, 이것은 이우환의 주장처럼 존재론보다는 관계론에 가깝다.
그렇다면 그런 이우환의 작품들을 어떻게 감상해야 할까? 후설의 '괄호묶기(에포케, Epoche)' 개념을 빌려 말하자면, 모노하의 목적은 감상이라는 행위로부터 일련의 에토스를 제거하는 것, 달리 말하면 판단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작품 감상에서 과학적, 윤리적 토대를 배제하고, 실재와 현상을 구분하려 하지 않고, 드러난 현상들을 그저 관찰하여(이것을 이우환은 '만남'이라고 한다) 어떤 참된 지각, 자아의 발견 따위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메를로-퐁티의 이론도 되짚어볼 만하다. 메를로-퐁티는 "나는 나의 몸이다"라는 명제로 심신이원론을 부정하고 지각의 우선성을 강조한다. 감관을 통해 획득된 정보들에 주체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지각이며, 지각된 모든 것들이 나의 주관성으로 환원되는 것이 바로 경험이다. 이 경험들을 통해 지각된 세계의 외연이 확장되고, 과학주의적 인식론의 한계는 극복된다. 이는 현상학의 기본 테제 그 자체이다. 여기서 '만남'이 대체 무엇과의 만남이냐고 묻는다면 실패다. 그 무엇을 전제하고 있지 않다. 굳이 말하자면 세계, 지각된 세계다. 이 모호함을 규명하기 위해 일본의 전통 미학이나 동양 사상등이 동원되는데 내가 잘 몰라서 설명을 생략한다.
전공자가 아닌 나는 후설과 하이데거를 100% 이해하고 있지 못하므로 이우환을 100% 이해하고 작품을 본다고 하긴 어려우며, 다 알고 본다고 해도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긴 한데(나는 이미 사유된 언어를 단지 미술로 치환해낸 것을 예술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원대한(?) 창작의도와 달리 현실에서 이우환이 소비되는 양상이란 대개 인테리어 소품 아니면 상속/재테크 수단 정도가 대부분이라는 점은 늘 불만이다. 이는 아마 다작을 하는 작가, 그것도 조형적으로 매우 세련된 스타일을 가진 작가들의 공통된 숙명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에 이우환 화백 자신이 일조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개인적인 의혹이다.
점 하나 찍어 양산되는 작품들이 수억에 팔린다. 요즘은 수많은 중산층들도 에디션이나 프린트를 구입해 집이나 가게에 장식한다. 모노하의 이념이 무색하게, 가장 즉물적으로 소비되는 현대미술 작품 중 하나가 이우환의 회화 아닐까. 만남과 관계맺기가 아닌 일방적인 객체, 오브제, 대상으로만 소비되고 있지 않나. 이러한 현실에 작가는 어떻게 응답하였나. 자가복제하듯 그저 똑같은 작품들만 주구장창 생산해내고 있지 않나. 작품으로든 언어로든 침묵한 채, 이미 클리셰가 되어버린 점과 선들만 무수히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우환의 침묵은 모노하의 실패를 시인하는 것인가? 아니면 예술가적 고집인가? "이거 나도 그리겠다"라는 비난에, "주문제작한 특수 물감과 붓, 특수 캔버스로 오랜 시간에 걸쳐 덧칠해서 힘들게 정성껏 그린다~"라는 갤러리의 부연설명은 궁색하다. 만드는 데 더 오래 걸리는 수제 목공 오브제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만원에 판다. "이러이러한 급진적 개념과 혁신적인 철학이 담겨서~"라는 합리화는 어떤가. 그림을 산다고 우리가 개념까지 소유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인터넷 서점에서 12,000원에 살 수 있다. 이우환은, 그리고 모든 현대미술은 이러한 미심쩍은 시선들, 비난의 눈초리들, 모든 평가절하에 대항할 수 있는 자기만의 고유한 언어를 가져야 한다. "니들이 뭘 몰라서 그래"라는 답변은 엘리티즘이고 상징폭력이며 아무 것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
이우환의 비싼 그림은 걸리는 모든 곳마다 그 공간과 장소를 강력한 아우라로 지배한다. 이것은 자본주의이기 이전에 모더니즘이다. 모더니즘을 지향한 모더니즘은 문제가 없지만 모더니즘을 지양하면서 모더니즘이 되는 것은 데카당스다. 모노하에겐 끔찍한, 그야말로 최악의 전락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