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출처 : 무라카미 다카시 인스타그램 @takashipom
무라카미 다카시는 현대 일본 서브컬쳐인 '아니메'의 토대에 일본 전통회화와 우키요에 등의 작법을 접목하여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과 변증법적 표현 양식을 창조해낸, 즉 형식의 차원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작가다. 과도한 상업주의라고 욕먹어도 결코 이 대단함이 퇴색되지는 않는다. 팝아트의 표현적 가능성을 새로이 보여준, 회화사적으로 의미있는 작가인 것이다. 그의 작품을 실제로 볼 때 늘 경탄한다. "와! 이렇게 그릴 수도 있구나!" 그러나 슈퍼플랫이라는 미심쩍은 개념을 만들어 작품을 종속시키고 의미를 자꾸 끼워맞추는 건 좀 별로다. 그의 작품에 기존의 미학적 관점을 전복하거나 균열을 줄수 있을 정도의 저력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물며 실제로 그런 정치적 의미에서의 가치 평등 따위를 지향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결론부터 말하면 슈퍼플랫은 하위예술과 상위예술의 경계를 해체하지 못했다. 기존의 계급적/인식론적 토대, 수용자의 취향과 아비투스에 미친 영향도 딱히 없다. 위를 끌어내리든 아래를 높이든 위아래의 기준이 그대로면 전복이 아닌데, 뒤집어진 것도 끌어내려진 것도 없지 않은가. 무라카미의 성공은 그라는 개별자만 혼자 높아진 것, 그러니까 성공한 인정투쟁에 가깝지 혁명적인 사건은 아니다. 요컨대 저급한 것으로 여겨지던 오타쿠 문화의 형식적/내용적 일부, 피상이자 편린에 가까운 무엇을 잘 매만져 수십억에 팔리는 상위예술로 받아들여지게끔 하는 데에만 성공한 것이다. 하위예술 일반이 진정으로 상위예술이 '된 것'이 아니라 단지 '받아들여졌을 뿐'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런 사례는 현대미술에서는 꽤 흔하다. 스트릿 패션과 융합하여 힙스터들의 애호를 받는 등의 현상이 예술의 유의미한 대중화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미술품이 사치재로 소비되고 거래되는 일은 매우 일반적이며, 무라카미는 다만 좀 더 웨어러블한 형태로 뭔가를 만들어 팔았을 뿐이다. 그렇게 치면 바질 아블로가 더 슈퍼플랫이고 예술인데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하위문화간 중심의 수평이동과 교배를 두고 경계를 무너뜨렸네 하는 것은 좀 궁색하다는 것이다. 상위예술이 더 우월하고 지적이며 가치있는 예술이라는 전제는 그대로 둔 채 아닌가. 선망과 소유욕이라는 게 왜 생기겠는가. 내 생각에 슈퍼플랫이라는 개념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무라카미의 작업들은 그 자체로 예술적이다. 굳이 앞뒤도 안 맞는 레토릭에 의존하지 않아도, 작품의 형식적 탁월함만으로도 충분히 수용자를 설득할 수 있고 감각을 뒤흔들 수 있는 에너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슈퍼플랫보다 오만배는 엄밀하고 획기적인 개념을 갖다붙였어도 이만큼 성공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요컨대 슈퍼플랫은 초창기처럼 그저 작법상/형식상의 사유 정도였으면 족했다. 일본 전통 회화와 아니메의 교합을 설명하는 부수적 개념, 한 장의 캡션 정도였으면 담백했을 것이다. 그것을 거대한 하나의 사조, 운동으로 확장하려는 무라카미의 시도는 개념과 작품 간의 모순, 괴리감만 점점 키워 갈 뿐이다. 좋은 예술 작품은 가만 놔둬도 스스로 담론을 창출하고 비평을 자아낸다. 창작자가 앞장서서 거대담론을 들이밀고 해석의 기준과 비평의 방향성을 제시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무엇보다 지금의 무라카미가 그런 궁색한 인정투쟁을 계속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스스로의 정체성이 경계선적이기에 자꾸 경계를 허무네 어쩌네 하는 상투적 수사에 집착하는 것일까? 모를 일이다. 이래저래 나는 여전히 무라카미의 다음 작업을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려한다. 오랜 팬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상업적이면 어때. 이렇게 하니까 어쨌든 X나 예쁘지 않아요?" 이런 담백한 말을 하는 무라카미를 보고 싶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