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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with Fugue Jun 18. 2024

맛의 미학, 미학적 맛

  집 앞 어떤 대형 초밥집은 냉동제품, 점성어, 크래미 맛살 같은 처참한 재료를 쓰면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초밥집이 되겠다”는 광고판을 집채만하게 걸어놨다. 지나면서 볼 때마다 실소를 금할 수 없는 부분이다. 또 경기도 모처의 어느 초밥집은 “서울에선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초호화 오마카세”라는 워딩으로 인스타 광고를 돌리는데, 해동도 제대로 못 해서 육즙 다 빠진 오도로를 내는 집이 할 말은 아니지 싶다.

  말도 안 나오는 수준의 야끼소바 비슷한 무언가를 파스타라고 3만원대에 팔면서 이태리 정통 운운하는 식당은 발에 채일 만큼 많고, 파인다이닝 느낌의 그럴듯한 플레이팅에만 천착하는 자칭 한식 셰프들의 겉멋과 어설픔, 식재료에 대한 무식과 만행은 도를 넘은 수준이다. 자기 손으로 메주 띄워 된장도 안 담가본 이들이 무슨 한식을 논한다는 말인지, 김장부터 제대로 배우고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것은 업에 대한 모독을 넘어, 미식이나 요리 문화에 대한 이해나 관심, 경험이 당연히 부재할 수 밖에 없는 대중을 호도해 이익을 챙기는 일종의 사행성 구조다. 생업이라고 하여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대중이 뭘 모르는 건 넘어가더라도, 그 필연적 무지와 정보의 비대칭을 악용해 속 빈 강정을 대단해 보이도록 포장하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이 구조가 스탠다드가 되면 뭔가를 제대로 공들여 만드는 사람들은 다 고사하고, 세상엔 얄팍한 상술만 남게 되기 때문이다. 그 때에 나는 대체 뭘 먹고 살아야 하는가.

  뭔가 말로써 마케팅을 하고 싶다면, “우리는 정직하게 신선한 재료만을 사용합니다. 고객에게 늘 최고의 맛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정도면 족하다. 그러나 슬프게도 모든 광고는 선정적이지 않으면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어렵다. 대중은 진심이나 진실 따위가 아니라 감각을 직격하는 자극적 문구에 반응한다. 공급자의 도덕적 해이가 모든 문제의 원인처럼 보여도, 진정한 사태의 근원은 대중의 미학적 속성 안에 있다는 것이다.


  소위 ‘미학적인 것’이란 분야를 막론한 하나의 사회심리적 총체이자 감각의 경향성, 나아가 선택과 판단의 준거이다. 그것은 지배적 이데올로기나 규율 권력에 의해 구성되고 분배되는 한편, 사람들의 상호작용으로 변형되고 재생산된다. 쉽게 말해 외모지상주의나 배금주의 같은 천박한 정신성이 사람들의 심미적 토대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음식도 음악도 미술도 패션도 심지어 정치나 윤리도 피상과 인상에만 천착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더 이상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지도 원하지도 느낄 수 있지도 않기 때문에, 그럴듯한 말만 늘고 빈껍데기만 판을 치는 것이다. 요컨대 대중은 무언가가 유행이라면 기꺼이 호도당하기를 즐기며, 최고, 초호화, 정통이라는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관심이 없다.

  이것을 일시에 변혁해 고양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당연히 없다. 그래서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개인 단위에서 우리는 때론 어떤 우연성에 의해 변화되기도 한다. 역치를 높인다고 표현할 수도 있고, 감각과 취향을 훈련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우연히 귀에 꽂힌 바흐의 대위법 선율에, 혹은 우연히 들어간 동네 중국집에서 맛본 제대로 만든 볶음밥 한 접시에, 사람은 다시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새로운 사람으로 격변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은 원래 그런거야“라면서 기존 구조를 재생산하고 빌붙어 살아가고자 한다면 한낱 범부다. 범부를 욕하긴 그렇지만 칭송할 일도 아니다. 범부들이 지닌 악의 평범성,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생각하면 경계심조차 든다.


  세상과 자신을 속이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의 업에 충실하며 정진하고 고민하는 진짜 요리인들의 음식을 맛볼 때면 나는 그 필연적 우연성, 오감을 일통하는 예술 체험에 전율하곤 한다. 그런 경험이 누적돼야 사람들은 무엇이 본질이고 가짜인지, 무엇이 제대로 된 요리인지 분별하고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힘든 생활인들에게 이것을 강요하는 것은 물론 억압이고 폭력이지만, 한순간의 유행으로 끝나지 않고 오래오래 자리를 지키며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많은 식당들은 다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렇게 해 왔고, 당연히 장사도 잘 된다. 변수라면 운과 경제상황인데, 그건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니 변명거리가 아니다.

  문정동의 작은 중식당 ‘창룡’을 생각한다. 인스타에서도 유튜브에서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믿을 수 없는 수준의 탕수육과 깐풍기를 맛볼 수 있는 소중한 곳이다. 가게 입구에는 “우리 가게는 냉동이나 대량 덕용제품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모든 메뉴는 주문 즉시 조리됩니다”라는 문구가 간결하게 적혀 있다. 광고도 안 하는 동네 중국집이지만, 요리사의 흔들림 없는 자부심이 엿보이지 않는가. 여태 호텔 중식당 위주로 즐겼던 나는 이 곳의 탕수육을 맛보고 개인적인 맛의 기준을 새로 정의할 정도였다. 요컨대 세상엔 인스타나 유튜브가 알려주는 것들보다 훨씬 훌륭한 식당들이 많다. 그대는 홍콩반점과 원할머니보쌈만 남은 세상, 겉멋 든 자칭 셰프들만 남은 미래를 살고 싶은가. 선택은 당신의 몫이고 그 결과는 미래의 우리가 함께 감당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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