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못 믿을 DB와 취소하지 못한 동물원 가이드
조마조마했다. 엊그제부터 30도가 넘는 무더위가 이어졌고, 땡볕에 지친 아이들과 동물원을 걷는
모습을 상상하며...... 그런데 금요일 아침은 시원했고, 어둡게 드리운 구름은 비를 예고하고 있었다.
우산과 비옷을 챙겨 넣고 기차역에 도착하니 몇몇 동료는 이미 기차역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이번 소풍을 기획한 사람은 라라, 그녀는 반드시, 꼭 하이델베르크 동물원으로 소풍을 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본인이 계획을 세우겠다고 총대를 메고 나섰다. 그게 벌써 6개월 전이던가...... 우리는 그녀의 불타는 의지에 동의했고, 나는 두 살배기 아이들도 있어서 거리가 좀 멀다고 생각했지만 넘치는 의지를 꺾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세운 계획에 따라 잘 따라가면 되겠지.
그.런.데 그녀는 본인은 온라인 세미나 때문에 이번 소풍에 참가할 수가 없다고 선언을 했다. 그리고 소풍 전까지 그녀가 준비한 것이라고는 고작 유치원에서 하이델베르크까지 가는 교통편을 검색하고 동물원의 티켓 가격을 문의한 것이 전부였고, 그것도 제대로 된 정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전 원장이었던 마누가 본인과 상의도 없이 아이들을 위한 동물원 가이드 투어를 신청했고, 취소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그것마저도 제대로 취소하지 않고, 그저 구두로 취소신청을 넣었는데, 공교롭게도 담당자가 해당사항을 전달하지 않고 휴가에 간 바람에 취소가 되지 않았다. 부원장으로 책임을 지게 된 티 나는 아침부터 이러한 상황에 심기가 불편해 있었다.
배낭을 메고, 노란 유치원 티셔츠를 입은 아이들은 하나둘씩 부모와 출발지점으로 모였고, 유치원 티셔츠가 소풍을 위한 것인 지 몰랐던 키키와 며칠 결석을 해서 티셔츠를 받지 못했던 해닝만 빼고 모두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교사들도 검은색 단체 티셔츠를 입었고, 엄마와 함께 참가하기로 한 디안이 만 빼고 다 모였다. 그런데 니사의 엄마가 나를 조심스럽게 부르더니, 본인의 커다란 배낭을 내밀었다. "이게 좀 커서, 니사가 맬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어른용 배낭에 1리터 생수병과 기저귀, 도시락 등 2kg는 되어 보이는 배낭이었다. 나는 너무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도대체 누가 이걸 들고 가라고 아이의 소풍에 이런 식으로 짐을 준비한단 말인가? 엄마는 내 눈치를 보며, "어... 첫 소풍이라 몰랐어요. 어떻게 하지?" 기차시간은 5분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니사의 엄마는 누군가가 가방을 들어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그때 문제가 터졌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곧 출발할 우리 기차가 목적지인 하이델베르크에 정차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계획한 기차뿐 아니라 그다음 기차도 하이델베르크에는 정차하지 않는단다. 오.. 마이.. 갓! 두 살부터 여섯 살까지 아이들 27명과 인솔 교사와 학부모 등 10명, 각자 핸드폰으로 하이델베르크 동물원에 갈 방법을 검색하고, 나는 혹시 우리가 계획했던 기차를 안 타고, 한 시간을 기다릴지도 모르니 니사의 배낭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제야 니사의 엄마는 허둥지둥 기차역을 빠져나갔다. 에 휴!
오전의 기차로는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할 수 없어서, 우리는 결국 중간에 내려서 트램을 2번 갈아타고, 또 한 번 버스로 갈아타는 루트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출근 시간이라 기차 안은 붐볐고, 아이들은 대부분 처음 기차를 타 보는 것이라, 기차에 탈 때는 환호했지만 트램을 두 번이나 갈아타고, 버스에 오르자 보채기 시작했다. 배도 고프고, 벌써 피곤하다며 "최악의 날"이라는 허풍 심한 핀의 민원이 귀를 찌른다. 또 트램과 버스를 갈아탈 때마다 도심에서 정류장을 찾는 일 또한 쉽지 않았다. 그렇게 고생고생 끝에 하이델베르크 동물원에 내리자, 아침에 출발지에서 못 만났던 디안이 엄마와 동물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차로 와서 우리보다 훨씬 일찍 도착한 것 같았다. 유치원에서 출발하는 줄 알고, 엉뚱한 곳에서 기다렸다고 한다. 시골 마을 유치원인지라 다른 유치원보다는 마을 토박이 독일 아이들이 많은 편이지만, 요즘은 폴란드, 세르비아, 불가리아, 터키 등등 이민가족 어린이의 비율도 점점 높아지고 있고, 그래서 부모들이 독일 유치원 행사나 공지사항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떨어지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티나와 탄야는 동물원 티켓을 사러 티켓부스를 들어갔고, 아이들과 다른 교사들은 바깥에서 기다리는데 가이드투어 취소건 때문에 다른 손님이 없었는대도 대기시간이 15분쯤 걸렸다. 동물원 측에선 이미 투어를 준비했으며 취소를 해도, 환불은 불. 가. 능. 했다. 하지만 두 시간 반이나 걸리는 투어에 아이들은 집중할리 만무했고, 돈은 버린 셈 치고 그냥 우리끼리 구경하기로 했다. 이미 기차와 트램과 버스로 녹초가 된 아이들은 비를 맞으며 건물 밖에서 기다렸고, 티켓을 받아서 입장을 하자,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장대비로 변해가고 있었다.
다행히 하이델베르크 동물원에 몇 번 와 봤던 교사들이 비를 피할 만한 곳을 찾았고, 커다란 해적선의 모양을 한 놀이터의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며 아침 식사를 했다. 식사와 화장실을 다녀오니 대략 11시가 되어갔다. 두 시간 반 이상, 출근길 교통체증 속을 뚫고 겨우 동물원에 도착했는데, 빗 속을 헤매며 동물원 구경하다니...... 아이들은 동물 구경보다는 놀이터에서 놀고 싶어 했고, 비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지친 심신 때문인지 나는 도무지 동물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추가된 무거운 배낭 때문에 니사 엄마를 향한 화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다행히 비는 오다, 그치다를 반복했고, 아이들은 아침도 먹고 조금 기운이 나서인지 팔랑팔랑 걷고 뛰며 동물 우리를 구경했다. 아마 이번 소풍에서 가장 잘 한 준비는, 교사들이 아이들을 3-4명 나누어서 팀을 구성한 일이라고 하겠다. 보통은 아이들끼리 둘 씩 짝을 지어서 줄지어 이동하고 인솔교사가 앞 뒤에서 살피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우리는 어린아이들이 너무 많았다. 그나마 내가 맡은 아이 중 한 명은 소풍 전 전날 설사가 나서 참여하지 못하게 되어서 나는 세 명 만 집중 케어. 중간중간 전체 인원 점검을 물론 했지만, 각자 본인이 맡은 아이들을 빠르고 쉽게 파악할 수 있어서 관리가 편했다.
하이델베르크 동물원은 생각보다 크지 않아서, 한 바퀴 휙 돌아보고 12시쯤 점심 식사를 할 수 있었고, 아이들은 아침에 놀고 싶어 했던 해적 놀이터에서 감자튀김과 아이스크림을 먹고는 한 시간쯤 놀았다.
우리의 기차는 14시 20분이라서, 13시 50분쯤 버스를 타고 기차역으로 가도 충분했다. 그래서 동물원의 놀이터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좀 13시 30분 버스를 타고 일찌감치 기차역의 플랫폼에서 버스를 기다릴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하다가, 일찍 가서 기다리는 쪽을 선택했다.
결국 일찍 버스를 타고 관광객과 승객으로 붐비는 하이델베르크 기차역 플랫폼에 앉아서 남은 간식들을 먹었다. 사실 플렛홈은 그리 깨끗하지 않았고, 방뇨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냄새도 나고, 흡연구역 옆에 앉아서 담배 연기도 풍겼지만 아이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떤 아이들은 아예 바닥에 누워 뒹굴었다. 30분을 기다려서 드디어 기차가 드어올 시각이 되었는데,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안내 말씀 드립니다. 00방향의 기차는 플랫폼이 변경되었으니, 승객들은 9번 플랫폼에서 승차하시기 바랍니다." 역시 DB(도이치반, 독일열차)은 우릴 실망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 맡은 아이들의 손을 꼭 붙잡고, 전속력으로 계단을 오르고 다시 내려서, 9번 플랫폼을 향해 뛰었다. 일부러 일찍 기차역에 도착해서, 한 없이 기다렸건만...... 플랫폼 변경으로 이미 만석의 객차에 아이들은 한자리에 두 명씩 끼어 앉아야 했다. 아이들도 그야말로 모험이었던 소풍에 지쳐서 꾸벅꾸벅 졸거나, 아예 깊이 잠이 들기도 했다.
그나마 돌아오는 기차는 5-10분 정도의 지극히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지각"으로 목적지까지 도착했고, 부모들이 모두 기차역에서 대기하고 있어서 아이들을 바로 인계할 수 있었다. 거의 세 시간에 달하는 왕복 교통이용 시간, 그리고 두 시간 반 정도의 동물원 구경. 처음이지 마지막의 소풍이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소풍을 계획하는 것도, 비가 오거나 교통편에 문제가 생겼을 때 대처할 수 있는 차선책도 앞으로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그저 무사히 돌아왔다는 점에 감사하고, 다행이다. 아이들은 힘들었다면 또 힘든 것을 체험하는 시간이었겠지만, 다시는 반복하지 않아야 할 소풍이었다!
너무 피곤해서, 함께 소풍을 갔던 학부모와 인턴과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서 잠이 들었다. 라라와 마누에게 무섭게 눈을 흘겨주고 싶은 하루였다.
유일하게 촬영한 사진 한 장, 플라밍고들이 사는 호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