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부르는 이름은 아무래도 첫사랑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처음 만난 건 한창의 봄날이었다. 날짜는 봄이었는데, 날씨도 봄이었던가? 날씨 따위는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사랑에 모든 걸 잊었다. 나는 어느 순간 잔잔한 물에 작고 동그란 돌을 가볍게 던지듯, 퐁. 하고 그에게 빠졌다. 왜 사랑에 빠졌을까? 묵묵하게 있던 그가 나와 둘만 남겨지자 재잘대는 모양새가 꼭 작은 새 같았다. 와글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 둘만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를 보는 내 마음속에는 순수한 사랑만이 가득 찼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고전적인 법칙이다.
다음 날 사랑을 인지하고 처음 한 말은 ‘망했다’였다. 이 애정은 받아지지 않을 거야. 그 확신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상황적 요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망했다고 연신 말하며 침대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래도 표현이나 해봤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사랑이 전해졌다. 전해져서 더 커지고 더 커져서 나에게 다시 전해졌다.
이거야말로 사랑이야, 혼자서 확신했다. 나는 처음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다. 하루하루가 다채로웠다. 그와 커다란 마을에 표시하듯 이곳저곳에서 입을 맞추고 다녔다. 우리만의 손잡는 방법이 생겼고, 우리만의 말버릇이 생겼다. 우리만의 포근한 자세가 생겼고, 우리만의 사진과 추억과 이야기의 흔적이 나의 방 한쪽 벽면부터 물감이 퍼지듯 번져갔다.
그런데 여느 사랑이 그렇듯 우리는 결국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됐다. 싸웠다던가, 누구 하나가 마음이 줄어든 것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예상했던 상황적 요소들 때문이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걸 알고 사랑에 뛰어든 거다. 이렇게 사랑에 걸림돌이 될 줄은 모르고, 호기롭게도.
그와는 며칠에 거쳐 울며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가 안 되는 이유들에 대해. 울다가, 달래다가, 울었다. 정말 안 될까? 정말 우리 방법이 없을까? 말도 안 되는 ‘만약’을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다보면 숨이 벅찰 정도로 서러워지다가도 어느새 또 지친 눈으로 바닥만 내리보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에게 목소리 한 번을 높이지 않았다. 사랑이 티가 나는 부분이었다.
마지막 말로는,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야말로 우리에게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우리의 사랑에 제목을 붙인다면 어쩔 수 없는 사랑이 아닐까? 어쩔 수 없이 빠졌고 어쩔 수 없이 멈추게 됐다. 오늘은 그와의 기억을 정리하려고 한다. 그래서 더없이 행복했던 기억을 남겨두려고 한다.
우리는 여름날 새벽에 손을 잡고 차도를 거닐었다. 그러다가 신이 나면 뛰기도 하고, 그는 내가 넘어질까 걱정도 했다. 그게 그렇게 즐거웠다. 아무도 없는 공원에 누워 드높은 하늘을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는 눕기를 부끄러워했지만, 결국은 나를 따라 누웠다. 아마도 내가 그걸 원했기 때문에. 그 사실이 또 나를 행복하게 했다. 늦은 아침까지 뒹굴거리며 별 것도 아닌 이야기로 시시덕거리기도 했다. 공부를 해야 하는데 하지 않는 그를 구석에 가둬두고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공부를 시키기도 했다. 별것도 아닌데 참 웃기다. 갑자기 기차를 타기도 했다. 순식간에 우리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실컷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자유로운 사랑을 맛보기도 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마지막 단어를 끄는 말버릇이 같아졌다. 투덜거리는 말투와 삐지는 표정이 같아졌다. 나는 그에게 물들어 불면증이 사라졌고, 그는 나에게 물들어 융통성이 늘었다. 서로 다름에서 오는 불안보다 이미 말하지 않아도 알기에 느끼는 안정이 커져갔다.
우스울 정도로 사랑했다.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서로에게 사랑을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리고 우스울 정도의 순수한 사랑이었다. 헤어질 것을 알고도 시작하는 어쩔 수 없는 사랑. 그를 생각할 때면 사랑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우러나오는 사람이다. 그를 첫사랑으로 기억하겠지.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그를 떠올리겠지. 아마도 그럴 거다.
사랑다운 사랑을 했다. 그에게도 내가 그런 사랑이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