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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하진 Sep 04. 2023

미래 조직의 모습은?

이화여대 윤정구 교수님의 글 발췌

내가 좋아하는 윤정구 교수님의 글을 따로 담기가 마땅치 않아 전문을 옮겨 놓았습니다. 


사실 미래 조직은 구성원들의 성향이 기능실현추구에서 자아실현추구로 급격히 이동 중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뜻은 지금의 부모세대의 삶의 방식과 MZ세대의 삶의 방식이 다르다는 점이고 또한 시대가 요구하는 것도 달라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뭔가 기능을 제공하고 대가를 받아 살아온 시대는 급격히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대학을 안가고 직장을 뛰쳐 나오는 일이 점점 더 늘어나는 원인도 그런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미래에는 기능실현은 로봇과 인공지능이 자아실현은 인간이 담당하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초뷰카'란 변동성(Volatile)과 불확실성(Uncertain), 복잡성(Complex)과 모호성(Ambiguous)의 머릿글자를 딴 뷰카(VUCA)의 더욱 심화된 형태를 일컫는 단어입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MZ세대를 포함한 우리들은 이제 자아실현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한 탐색과 도전이 반드시 필요한 시점입니다. 

조직도 이런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구성원들과 어떻게 조화로운 공동체를 만들까를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이런 와중에 윤정구 교수님의 글을 보면서 이해가 빠르게 잘 정리된 글이어서 공유드리게 되었습니다.  

참고하시면 큰 도움이 되실거라 믿습니다. 


초뷰카 (Hyper VUCA) 시대의 생존법


운전석을 탈취하라!


삶이 변화가 없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상황이라면 조수석에 앉아 있는 체험과 운전석에 앉아 있는 체험이 구별되지 않는다.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운전수보다는 조수석에서 운전 신경쓰지 않고 밖의 경치도 감상해가며 목적지까지 가는 체험이 더 유리하다. 


하지만 지금처럼 변화와 위기가 상수인 초뷰카 시대에 조수석을 고수한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언덕이 이어지는 고갯길이나 구불어진 비탈길을 운전할 때 조수석에 앉아 있다고 상상해보라. 아무리 위장이 튼튼해도 구토와 멀미를 피할 수 없다. 심지어 멀미가 심하다는 이유로 그나마의 조수석도 포기하고 뒷좌석으로 물러나 앉는다면 구토와 멀미는 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된다. 여정을 포기하고 차에서 내려야 한다. 


곡예길에서도 운전석에 앉은 사람은 구토하거나 멀미하지 않는다. 멀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운전에 익숙하면 운전을 즐긴다. 곡예길에서 운전대를 잡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고속도로에 비해 운전이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다이내믹한 사건이 되는지를 기억할 것이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지금의 삶이 곡예길을 운전해가는 상황이라면 운전자의 책무를 버리지 않는 것이 구토와 멀미를 초월(Transcendental)하는 비밀인 셈이다.


경험(Objective Experience)과 체험(Subjective Experience)은 같아 보이면서도 다른 개념이다. 경험은 다른 사람과 같아지는 삼인칭 과정을 담은 조수석의 경험이고 체험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일인칭 과정을 담은 운전석의 경험이다. 조수석의 경험에는 원심력이 작용하고 운전석의 체험에는 구심력이 작용한다. 흔히들 경험을 통해 외적 통찰(Outsight)를 얻고 체험을 통해 내적 통찰(Insight)를 얻는다고 말한다. 


경험을 통해 사람들은 세상의 돌아가는 공동의 운동장을 익히고, 체험을 통해 이 운동장에서 직접 뛰는 선수가 되기 때문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자신 여정이 고속도로가 아니라 곡예운전이 요구되는 고갯길이라면 조수석에서 과감하게 운전석으로 갈아타야 한다.


세상의 규범을 익히고 사람들과 같이 살려면 객관적 경험이 필요하지만 많은 사람들 중에 자신의 고유성을 주장하려면 체험이 필수적이다. 정상적 성인으로 살기 위해 객관적 경험인 사회화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경험하는 것도 필수적이지만 객관적 경험의 맹점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똑 같은 대체가능한 사람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경험만을 축적할 때 어느 순간 우리는 대체가능한 물건으로 전락한다. 경험의 폭이 넓어지면 마치 스위스 나이프처럼 더 유용한 대체가능한 물건이 된다.


변화가 없는 세상에서는 답이 과거에 의해서 정해진 시대였기 때문에 자신의 경쟁력이란 얼마나 보편적 경험을 통해 더 많은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에 의해 결정되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변화가 상수이고 이 변화 속에서 모두가 길을 잃을 수 밖에 없는 초뷰카 세상에서 경쟁력은 객관적 전문성을 넘어서 자신이 왜 대체불가능한 존재우위를 가진 사람인지를 소구함을 통해서이다. 지금은 심지어 chat GPT에 의해 전문적 지식이 민주화된 시대이기 때문에 이런 전문적 지식이 왜 자신을 통해 실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존재우위를 소구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대체가능한 사람임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자살행위다.


지금과 같은 초뷰카 시대 객관적 경험에만 의존해가며 자신을 삼인칭 조수석에 머물게 하는 것은 치명적이지만 더 심각한 우려는 아무 생각없이 SNS나 AI 알고리즘에게 운전대를 맡기는 경향이다. SNS나 AI 알고리즘에게 운전대를 맞기는 순간 운전대를 찾아올 방법은 영구히 사라진다. 운전자의 주체성을 빼앗긴 상태로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이들이 시키는 명령을 집행하는 노예생활이 시작된다. AI 알고리즘에게 운전대를 맡기기 시작하면 구토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본인이 왜 구토에 시달리는지 이유도 간파하지 못한다. 심각한 구토에 시달릴 때마다 운전대를 찾아오기는 보다는 운전대를 더 강력한 AI나 SNS에 맞기기는 우를 벗어나지 못한다.


지금과 같은 변화와 위기가 상수로 찾아오는 꼬불꼬불한 고갯길을 곡예운전해야 할 때는 자신이 운전대를 맡고 AI의 알고리즘에게 조수석을 맡기는 것이 맞다. 


지금의 초뷰카 시대에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작가가 되어 스스로 스토리를 쓰고 이 스토리의 일인칭 운전자로 나서는 사람만 구토와 멀미에서 벗어난다. 자신 삶의 작가가 되고 일인칭 주인공이 되어 삼인칭으로 객관화된 자신을 넘어서는 초월적 체험만이 대체가능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쟁우위를 넘어 서게 한다. 초뷰카시대는 운전대를 통한 일인칭 경험만이 대체불가능성의 존재우위의 세상을 열어서 보여준다. 초뷰카시대에는 경쟁우위를 넘어 존재우위를 확보한 사람들만 지속가능성을 만끽한다.




Work Hard Play Hard


자율성에 대한 오해


많은 회사들이 구성원에 대한 Micro Managing을 포기하고 자율권을 보장해주려는 쪽으로 선회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자율경영을 시도했던 90% 이상의 회사는 원래 방식대로 마이크로 매니징하는 방식으로 다시 회귀한다.


이 문제는 고 이건희 회장이 삼성전자를 통해서 해결하고 싶었던 경영의 화두였다.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물려 받은 삼성전자는 관리 삼성의 대명사였다. 좋게 말해서 관리이지 상사들이 구성원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마이크로 매니징하는 방식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이런 방식으로는 한국에서는 일류가 될 수 있는지 몰라도 글로벌에서 일등 삼성전자가 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삼성전자가 이건희 회장의 염원만큼 관리와 자율이라는 두 충돌하는 가치의 문제를 해결했는지는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자율성을 강조하는 기업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자율성이 초래하는 두 과정 손실 문제를 체계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그냥 선의에 기반해서 믿고 맡긴다는 생각 때문이다. 두 과정 손실은 조정의 문제와 동기의 문제다. 자율성은 일을 알아서 하게 하는 것이라면 서로 하고 싶은 일이 충돌이 생길수도 있고 일이 연속되어서 완성될 때 우선권을 조정하는 문제다. 결국 조정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많은 혼란을 자초한다. 


동기의 문제는 더 심각한 문제다. 자율적으로 일을 맡겨 놓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일하는 사람과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갈라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일하고 최대한 보상받으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고 일하는 분위기는 이들에 의해 오염된다. 회사는 자율의 가치를 선언한 만큼 나서서 "자율적으로" 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무어라고 간섭하기도 애매모호해진다. 이와 같은 상황이 더욱 진전되면 일하는 사람들에게 일이 더 맡겨지게 되고 일이 많아지는 많큼 책임져야 할 일도  많아진다. 결국 선의에 의해서 일을 택한 이들이 먼저 번아웃 상태에 빠진다. 


조정의 문제와 동기의 문제가 불거지면 회사 안에서는 다시 논쟁도 벌어진다. 일 열심히 안 해도 회사가 개입하지 않는 것을 거론해가며 일 안 하는 사람들의 무임승차 행위를 비난하기 시작하고 이런 비난은 윤리적 비난으로까지 비화한다. 또한 해야할 일이 조정이 안되니 일하는 사람들이 또 다시 나서서 모든 잡다한 일까지 하게된다. 이쯤되면 경영진의 인내심도 바닦이 나서 결국  자율경영을 포기하고 다시 마이크로매니징하는 옛날로 회귀한다.  


이런 현상은 미국 실리콘 벨리 IT 기업에서도 흔히 거론되는 문제다. 그냥 선의로 자율경영을 하면 해야할 일이 신속하게 진행되지도 않고 일하는 사람만 일한다. HR 시스템을 동원해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보상을 몰아주는 방식을 사용해보지만 기본적 연봉이 유지되는 한 일하지 않던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지는 못한다. 


자율경영에 대한 오해 때문에 생긴 문제다. 자율경영이란 자유에 대한 근력이 형성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자유에 대한 근럭이 없는 사람들에게 자율경영이란 그냥 혼돈이다. 


자유에 대한 근력은 구성원 대부분이 회사가 정한 존재목적에 대해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작동한다. 목적에 대한 믿음으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사명을 가지고 완수하려는 성향이 전제되어야 한다. 회사의 사명을 협업으로 완수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일에서 빈자리와 조율의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목적과 사명에 대한 공유가 자율경영 성공의 충분조건이지만 보상과 관련한 필요조건도 있다. 자율경영에 성공한 기업은 Work Hard, Play Hard의 방식으로 보상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자율성을 가지고 주인이 되어 일을 열심히 해서 성과를 내는 사람들에게는 경제적 보상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보상이 있다. 이들에게 일을 마친 후 쉬거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자유로 보상해 주는 정책이 Work Hard, Play Hard 보상 전략의 핵심이다. 일을 주도적으로 자율적으로 잘 한 사람에게 일을 더 주어서 번아웃 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 과제가 마무리되면 이들에게 휴가로 충분히 쉴 수 있는 자유를 주거나 일을 더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다면 자신들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로 보상하는 것이 Work Hard, Play Hard 전략의 본질이다.


본인이 자문을 해주는 한 한국의 회사에서도 이런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자율적으로 주인이 되어 일을 하니 회사는 자연스럽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일을 더 맡겼고 이 분들은 번 아웃되어 노동 생산성이 더 심각하게 떨어졌다. 다행히 회사가 긍휼감이 넘치는 회사여서 번 아웃된 분에게 강제 휴가를 명령했다. Work Hard Play Hard 보상 시스템을 가동해 이 사명을 자율적으로 완성했을 때 쉴 것인지 일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의 근력을 허락했다면 생기지 않았을 문제다. 이 회사도 이런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경영진의 우려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이 회사도 구성원들이 Work Hard, Play Hard 할 수 있도록 일터 안에 체육관을 도입했고 일하다 어려우면 충분히 쉬어가며 일할 수 있게 놀이터를 제공했다. 하지만 공유된 사명을 완수한 사람들에게만 자유가 보상으로 주어진다는 훈련뎐 근력이 없다면 자유는 무질서와 방만만을 가져온다. 자유에 대한 근력이 부족할 때 정작 주인의식을 가지고 자율적으로 일하는 사람만 일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회사를 놀이터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생긴다. 자유에 대한 근력이 떨어지면 정작 Work Hard한 사람들은 일들이 더 많아져 정작 놀이터와 체육관 시설을 이용할 시간이 없어지는 부조리를 경험한다. 


미국 ICT기업 중 아마존과 애플을 비교해보면 둘 다 자율성을 중시하지만 아마존의 경우는 일을 잘하면 일을 더 맡겨서 번아웃 시키는 스타일이고, 애플은 일을 주체적으로 잘하는 사람들에게 휴가의 선택권과 일의 선택권이라는 자유로 보상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쿠션을 더 허락하는 회사에 가깝다. 애플의 자유에 대한 근력은 구성원들이 회사의 존재목적에 대한 동의하고 믿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구성원이 회사의 존재목적에 대한 믿음과 이를 실현하는 근력을 가지지 못한 회사에서의 자율경영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형국을 초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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