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권의 역설

― 새로운 생존권 모델이 필요하다

by 전하진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생존할 권리를 가진다.

이는 천부인권의 핵심이며, 현대 국가가 존재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국가는 개인의 생존을 보호하기 위해 탄생했고, 산업화와 복지국가의 발전을 거치며 생존권은 점차 제도적으로 확대·보장되어 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은 “충분한 생활수준”을 인간의 권리로 명시했고, 대한민국 헌법 제34조 역시 국가가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할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하나의 기묘한 역설이 형성되었다.


생존권을 국가와 시장이 제도적으로 책임지게 되면서, 정작 개인은 생존을 위해 돈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일자리가 없으면 먹을 수 없고, 돈이 없으면 치료받을 수 없으며, 주거비를 감당하지 못하면 삶의 터전에서 밀려난다. 국가는 복지로 이를 일부 보완하지만, 그 재원과 운용 방식 또한 세금과 시장 논리에 종속되어 있다.


결국 생존권은 “보편적 권리”라기보다 “돈이 있으면 보장되고, 없으면 위협받는 권리”로 변질되었다.

이 역설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특성과 맞닿아 있다. 자본은 지속적인 성장을 전제로 작동하고, 그 과정에서 불평등의 확대는 필연적이다. 상위 1%가 세계 부의 절반을 차지하는 시대에, 여전히 수억 명의 인구가 최소한의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 여기에 기후위기로 인한 식량과 물 부족, 전쟁과 팬데믹의 반복은 기존 생존권 체계의 취약성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국가가 아무리 복지 예산을 확대하더라도, 구조적 불평등과 자원 고갈이라는 한계 앞에서 현재의 모델은 지속 가능하다고 보기 어렵다.


이제 우리는 생존권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


문제는 국가의 역할 자체가 아니라, 생존권이 국가와 시장에 과도하게 집중·독점된 구조에 있다. 국가가 모든 생존을 책임지고, 시장이 이를 화폐로 중개하는 현재의 모델은 위기 상황에서 지나치게 취약하다. 생존권을 국가로부터 ‘포기’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시장에 집중된 생존의 책임을 개인과 공동체로 분산시키는 새로운 구조가 필요하다.


이를 위한 대안으로 ‘살림셀(Salim Cell)’을 제안한다.


살림셀은 소규모 자립 공동체 단위의 최소 생존권 보장 유닛이다. 살림셀은 세 가지 핵심 요소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첫째, 재생에너지·물·기초 식량을 기반으로 한 지속가능한 생존 인프라(Zero Basic).

둘째, 주거·이동·돌봄·교육 등 도시 기능을 내재화한 생활 시스템(Urban Basic).

셋째, 의미와 관계, 문화와 예술을 창조하는 공동체 문화(Culture Basic)다.


이는 단순한 에코빌리지나 대안 공동체 실험이 아니라, 첨단 기술과 전통적인 살림의 지혜를 결합한 현실적인 생존권 보장 모델이다.


이 모델에서 국가와 시장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 다만 그 역할은 재정의된다.


국가는 생존권의 최종 보장자로서 최소 기준, 안전망, 데이터 표준과 제도적 기반을 제공한다. 시장은 기술 혁신과 자본, 확산 메커니즘을 담당한다. 그리고 살림셀은 개인과 공동체가 생존의 1차 책임 주체로서 기능한다. 이 3자의 역할 분담은 국가 책임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기 상황에서 사회 전체의 회복탄력성을 높이는 구조다.


한국은 이 모델을 실험하고 확산시키기에 특히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AI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폭증하는 전력 수요, 그리고 동시에 심화되는 지역 소멸 위기는 분산형 에너지와 지역 기반 생존 모델의 필요성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미 정부는 분산발전과 지역 활성화를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이 자원을 살림셀 구축에 전략적으로 연결한다면, 에너지 자립형 분산 네트워크를 구축함과 동시에 기후테크 산업의 새로운 시장을 열 수 있다.


더 나아가 살림셀의 탄소 감축량, 자원 순환률, 자립도와 같은 지속가능성 지표를 체계적으로 평가·인증하고, 여기에 문화·예술적 가치를 결합한다면 ‘살림 가치’를 가시화할 수 있다. 이러한 성과는 이후 ESG 투자와 멜란트로피 자본이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이 되며, 이는 기존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생존과 돌봄, 지속가능성을 새로운 가치 기준으로 전환하는 ‘살림자본주의’로 확장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자본 유입이 목적이 아니라, 살림 가치의 실현이 전제라는 것이다.


보편적 기본소득(UBI)은 개인에게 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생존을 보조하는 소극적 대안이다. 반면 살림셀은 공동체가 스스로 생존 기반을 구축하고, 그 과정에서 의미와 문화, 관계를 창조하는 능동적 모델이다. 이는 돈으로 생존을 구매하는 시대를 넘어, 생존 그 자체가 의미와 가치를 낳는 구조로의 전환을 지향한다.


생존권의 역설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시장이 모든 것을 책임지던 시대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 이제 개인과 공동체가 최소한의 생존권을 스스로 확보하고, 국가는 이를 뒷받침하며, 시장은 확산을 돕는 새로운 균형이 필요하다. 살림셀은 그 전환을 위한 현실적인 첫걸음이 될 수 있다.


한국이 이 모델을 선도한다면, 기후위기와 불평등의 시대에 인류가 제시할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대안 중 하나가 될 것이다.


2025년 12월, 생존권을 다시 정의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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